불명열과 화병이 병이나 질환이 아닌 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나서는 아프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남아있던 열은 기초체온으로 흡수되었고 무겁게 뭉쳐있던 명치끝 어딘가는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없게 바래졌다.
그렇게 내 안에 뜨겁거나 차갑게 토해낼 뭉치가, 마음이, 글이 점차 희미해졌다.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있었다. 언제부터 나와 함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반지하의 작은 방, 이부자리 위에 누워서 깜깜한 천장을 바라볼 때 우주를 말해주었고
크게 울고 난 후에 가족과 의무와 존재를 이야기했고
혼자인 낯선 곳과 수많은 밤에 혼자임을 잊고 그 목소리를 따라가게 했다. 내 안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나를 환기하고 돌아보고 곁에 있어준 것은 내 안의 목소리였다. 이중인격자와 같은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기보다, 좀 더 솔직하고 크게 볼 수 있는 자신이었다.
그 목소리가 커지고 계속 이어지는 날들에 나는 글을 썼었다. 안에서 맴돌고 있는 그 목소리를 글로 쓰고 정리하면서 스스로를 다독거려왔던 것 같다. 그렇게 그 목소리를 토해내는 글을 쓰고 나면 어떤 때는 목에 걸린 음식물을 토해내고 난 것처럼 가벼웠고 어떤 때는 숙제를 받은 아이처럼 무거웠다.
평소 즐겨보는 인스피아의 뉴스레터를 읽고 있었다. 요즘 글을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다는 제목에 고개를 끄덕이며 메일을 열어보다가 문득, 내게 토해낼 글이 생각보다 없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실은 꽤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예전처럼 그 목소리가 선명히 들리지 않는지. 듣는 법을 까먹은 건 아닌지. 아니면 그 목소리를 충분히 키우고 들어줄 시간을 내어주지 않은 건 아닌지. 하지만 그 목소리가 소리를 낼 만한 일이 점차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토해낼 어떤 뭉치도, 일도, 마음도, 그러니까 고통과 골치 아픈 일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혹은 깨달음.
사실 크고 작은 신경 쓸 일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자주 나타나지 않는 건 어쩌면 그 일들을 그만큼의 크기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전에 겪어봤기에, 이제는 나와 함께 고민해 줄 사람이 있기에, 이제는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에. 조금은 무던해지고 건조해지고 어른이 되었기에.
조금 대견하고 그래서 씁쓸하다. 그만큼 의연해진 자신이지만, 그만큼 토하듯 써낼 글이 줄어들었으니.
하지만 처음 이를 깨닫고 알 수 없이 편해졌던 한 켠의 마음을 지금은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