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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song 꽃song Dec 13. 2024

저마다 이름값을 하고 산다면

『옆집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사나?』에서는 옆집 엄마(숲 song 꽃 song)가 마흔 즈음에 써 둔 습작글 중에서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일상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연재합니다. 담장너머 옆집 엄마네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작은 웃음, 조그마한 삶의 팁이라도 챙겨가실 것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예요.


'그 많은 예쁜 이름 다 놔두고 하필이면 상신이가 뭐람.'


 미정 현정, 순임, 명희, 현숙, 정희 등 내 친구들의 이름과는 분명 다른 느낌의 내 이름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몹시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주변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엔 그것이 얼마나 싫었는지, 나와 똑같은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닌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사회과부도를 펴놓고 지명 찾기 놀이를 하던 중, '상신도'라는 섬을 발견하였다. 그저 내 이름과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뛸 뜻이 기뻐하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이름을 소개해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모기만 하게 줄어들기도 했다.

 사실, 내 이름은 고향에서 알아주는 한학자이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이름에 담긴 뜻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한문선생님은 자기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고, 어떤 의미가 담겼는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께 처음으로 내 이름에 담긴 뜻을 여쭤보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내 이름 석자에는 '이른 봄 버드나무 맨 꼭대기 뾰족 뾰족 새 순이 돋아나듯 항상 새롭게 살라'는 귀한 뜻이 담겨 있었다. 

 한문시간이 돌아왔다. 선생님께서는 한 사람씩 앞에 나와 자기 이름을 칠판에 쓰고 이름에 담긴 뜻을 풀이해 보라고 하셨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겨우 겨우 이름을 소개하였다. 뜻밖에도 선생님께서는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반겨주시면서 어느 분이 이름을 지어주셨냐고 물어보시는 게 아닌가. 반 친구들도 뜻이 멋지다며 열렬히 환호해 주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칭찬을 듣고 나니, 내 이름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 상 신'하고 발음해 보니 ㅇ과 ㅅ이 잘 어우러져 상큼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느낌이 뜻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내 이름을 소개하는 일이 즐거워졌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름을 좋아하게 되니 하는 말과 표정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어느 날부터는 이름에 담긴 뜻처럼 살아가야겠다는 생각과 노력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가끔씩 주변사람들로부터 이름에 담긴 뜻과 비슷한 덕담을 듣기도 했다. 자기 이름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삶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귀한 경험이었다.



 

 결혼한 부부에게 가장 큰 첫 번째 선물은 아마도 자녀의 탄생일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하늘이 내려준 귀한 자녀에게 여러 달 공을 들여 사랑과 기원이 담긴 최상의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을  두 아이의 이름을 지어보면서 알았다.

 첫 아이 임신을 확인하던 날,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한글이름사전을 구입했다. 그 후, 얼마나 많이 펼쳐봤는지 출산할 때쯤에는 너덜너덜해졌다. 남편과 수시로 얼굴을 맞대고 이름 짓기에 골몰한 끝에, 딸과 아들의 이름으로 각각 다섯 개씩의 이름을 최종 선정해 놓았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 이제 선정해 두었던 이름 중에 하나를 고르면 되었다. 막상 출생신고를 하려고 하니, 우리가 모르는 더 좋은 이름이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았다. 출생신고 마감 하루 전까지 망설임은 이어졌다. 작명가의 손을 빌릴 수도 있었지만, 평생 동안 불려질 아이의 이름만큼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기원을 담아 직접 지어 불러주고 싶었다.

 비단 나만 그렇게 유난을 떤 것이 아니었으리라.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의 이름에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과 사랑과 기원을 담아주려고 했을 것이다. 주어진 이름값만 제대로 하고 살아도 부모에게 큰 효도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교사가 되어, 어느 해부터인가 새 학기 첫 주 수업은 학생들과 함께 자기 이름에 대해 알아보고 소개해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나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자신의 이름을 긍정하고 좋아하는 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아보고 관련된 에피소드나 이름에 담긴 뜻을 자랑스럽게 소개해보도록 했다. 의외로 부모님께서도 자녀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모르고 지내다가 그제야 함께 알아보았다는 경우도 꽤나 있었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모님께 물어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학생과 함께 머리를 굴려가며 멋지게 이름의 뜻을 풀이해보기도 했다. 대부분 아주 좋아했다. 


아름이, 정아현주태림이하늘이사랑이…….


 한결같이 자녀가 사람답게 잘 살아가길 바라는 사랑과 소망이 담긴 이름들이다. 그런 까닭에 학생들이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을 마음 깊이 새겨두고 좋아해 주길 바라게 된다주어진 이름값만 제대로 하고 살아도 모두가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학생들에겐 때로는 자기 이름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보는 것은 어떠냐고 조언하기도 한다.

 

 정아처럼 마음이 곧고 아름다운 사람, 현주처럼 어질고 맑은 사람, 태림이처럼 세상의 큰 숲이 되어주는 사람, 하늘이처럼 뜻이 높고 푸른 사람, 사랑이처럼 사랑을 듬뿍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


 저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하며 살아가다 보면 저절로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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