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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 위의 빗소리

by 숲song 꽃song
『옆집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사나?』에서는 옆집 엄마(숲 song 꽃 song)가 마흔 즈음에 써 둔 습작글 중에서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일상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연재합니다. 담장너머 옆집 엄마네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작은 웃음, 조그마한 삶의 팁이라도 챙겨가실 것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예요.


새벽녘, 가만가만 들려오는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아파트 그것도 방 안에서 빗소리를 듣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요 며칠 무덥던 차에 내리는 비가 잠결에도 반가웠던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만인가? 새벽녘 빗소리에 눈을 떠 본 기억이. 아파트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가락 속에서 그날 밤 양철지붕 위를 경쾌하게 뛰놀던 빗방울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했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한밤중,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그즈음 친정아버지께서 폐암으로 투병 중이셨기 때문에 놀란 가슴으로 허둥지둥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급하게 묻는 내 말에도 아랑곳없이 전화기 저편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든 나의 목소리는 급기야 떨리기 시작했고 다시 묻기를 수 차례, 재차 물으려던 말꼬리를 슬그머니 내려놓고야 말았다. 전화선너머에서 진작부터 어떤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톡 톡 토닥토닥 톡 토닥…."


그것은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였다.

'누굴까?'
새벽이 다 되도록 빗소리에 잠 못 이루고, 우리 집까지 그 소리 전해 주는 사람은?'
'그는 빗소리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염려한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전화기 저 편에서 들려오는 양철지붕 위의 빗방울 연주를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것이다. 살며시 전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무언의 '화두'하나를 얻은 기분으로 하얗게 밤을 밝히고 말았다.


짚이는 사람이 있었다. P시인.

그는 가끔씩 한밤중과 새벽을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전화를 하곤 했었다. 봄비와 가을비가 내리는 쓸쓸한 어느 날이라든가, 진달래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할 즈음이라든가, 소리 없이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어떤 날엔 아무 말도 없이 기타를 치며 노래 몇 곡을 불러준 후 전화기를 내려놓기도 하였다. 그는 나보다는 남편과 더욱 가까운 사이였지만, 대부분 그의 전화가 울리는 날엔 우연하게도 내가 전화를 받은 적이 많았다. 나는 그런 그의 전화가 가끔은 반가웠고, 가끔은 짜증이 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전화를 받고 난 다음날이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더없이 싱그럽고 맑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의 전화는 바쁜 일상에 치여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내게 '행복하니?'하고 한 번씩 물어봐주는 푸른 안부인사가 아니었을까?


그날 밤 내가 들은 '양철지붕 위의 빗소리'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토해 낸, 그의 멋진 시 한 편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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