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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막걸리

by 숲song 꽃song


이따금 나는 땅에 묻은 항아리에서 퍼주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해지곤 한다. 생기발랄한 사람마저 맥을 못 추게 하는 더위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술꾼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순전히 친정아버지께서 당신도 모르게 내게 물려주신 막걸리에 대한 절대 미각을 갖게 된 탓이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많이 다녔다.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내가 주로 막걸리 심부름을 도맡았던 것은 아마도 제일 순순히 그 심부름에 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고 왜 무더운 한낮에 윗마을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일이 싫지 않았겠는가? 다만 서늘한 땅 속 항아리에서 퍼주는 냉 막걸리의 감질난 맛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게 유혹했을 뿐이다. 더위에 지쳐갈 때쯤 병뚜껑을 열고 찔금거리다가 막걸리의 텁텁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일찌감치 알아채 버린 것이다.


'쪼끔만, 쪼끔만'하며 홀짝거리다가 눈에 띄게 비워진 날은 동네입구에 있는 차가운 개울물을 채운 후 살짝 흔들어서 들고 갔다. 그런 날, 아버지께선 '오늘따라 술이 왜 이리 싱겁냐? 하고 혼잣말을 하시곤 했다. 등 뒤로 그 소리를 들으며 내 가슴은 두근거려 어쩔 줄 몰라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을 가장했다.


꽃과 막걸리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비가 내리고 취기가 오른 날이면 당신이 심어 놓으신 파초잎을 바라보시며 조지훈 시인의 '파초우'라는 시를 읊조리곤 하셨다.



파초우(芭蕉雨

조지훈(1920~1968)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않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 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마지막 구절은 언제나 눈물로 끝을 맺으셨다. 아버지의 음성이 흔들리는 마지막 대목쯤에 이르면 나도 따라 괜스레 슬퍼지곤 하였다.


대학입학 후, 많은 날들을 선배들 뒤따라다니며 막걸릿집을 순례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나를 키운 건 8할이 막걸릿집이라며 웃음으로 그때를 회상해 보는 나이가 되었다.


이따금 막걸리가 생각나듯, 이따금 궁금해진다

아버지는 가끔씩 막걸리가 싱거워지는 이유를 알고 계셨을까?

혹시라도 어린 딸의 소행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계셨을까?

꿈에라도 나오시면 놓치지 않고 한번 여쭤보고 싶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내 꿈에 아니 오신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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