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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mBom Mar 30. 2024

UNIT 16. 이야기를 건네는 물건

MONO PROJECT ARCHIVE

1976년 엄마의 기록이 남아 있는 노트를 보수해 재제본을 했다. 작년 11월 말에 의뢰해서 얼마 전 받았으니 두 달 가까운 시간에 걸쳐 작업되었다. 몇 년 전 부모님 집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가 엄마의 서랍장에서 발견한 노트였는데, 당시 회사에서 나눠주던 손바닥 사이즈의 평범한 줄 노트였다. 겉면의 비닐 재질 안쪽 페이지로 1976년의 달력이 들어있고 뒤로 쭉 엄마가 읽은 시와 소설 등 책의 어느 구절과 엄마의 간단한 메모가 담긴 노트였다. 순간 엄마에게 “이거 내가 가질게” 말하고 그때부터 책장에 보관한 채로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워낙 오래된 노트이다 보니 안의 종이 색은 이미 바래서 누렇고 겉면의 비닐 재질은 쪼개지고 제본 등도 터져서 낱장으로 메모가 뜯어진 상태였다. 새롭게 재제본을 해서 보관하겠다는 마음으로 관련된 곳들을 찾다 보니 관련 작업을 하는 공방을 발견했다.


1999년부터 홍대 앞에 문을 열어 예술제본과 관련 교육도 진행하고 있는 곳인데, 처음 시작하신 장인 분이 별세한 이후로 제자들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트를 들고 공방을 찾아가 보수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물었고, 안의 노트들은 페이지 별로 처리를 통해 더 이상 상하지 않도록 작업하고 새롭게 묶어서 단단한 하드커버를 입히는 방법으로 작업을 결정했다. 이전의 남색 커버는 너무 낡아서 더 이상 재사용이 불가능해 폐기하고 대신 베이지 컬러의 하드커버와 엄마의 이름을 노트 커버에 새겼다. 커버 안쪽은 엄마가 좋아하는 연보랏빛이 도는 꽃무늬 패턴을 넣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의 시간을 기다렸던 노트가 다시 돌아왔다.


엄마의 노트 뒷면에 끼워져 있던 엄마의 돌 기념사진부터 부츠 컷 체크 바지에 양 갈래머리를 하고 수학여행을 즐기는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 그리고 웨딩 사진까지 노트에 같이 페이지로 넣어 제본을 했다. 1976년 엄마의 시간뿐만 아니라 엄마의 인생을 같이 받는 것 같은 기분에 한참을 이리저리 펼쳐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새로 받은 노트를 사진 찍어 엄마에게 보냈더니 소중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답이 돌아왔다. 요즘은 부모님 댁에 가면 자주 아빠나 엄마의 옛날 물건들을 보면서 문득 내가 가져가겠다는 말을 하게 된다.


엄마가 30년 전에 입던 스웨터, 셔츠도 가져와서 조금씩 손을 봐서 다시 입고 있다. 문득 추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물건을 자꾸 가지려 드는 상황이 서글픈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의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이나 내 부모의 늙음도 같이 눈에 보이는 까닭인가 싶다. 이전이라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도, 하나씩 생각을 해보게 되는 때를 맞이하면서 부모님은 어떤 마음으로 나와 같은 나이를 보내왔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1976년의 엄마. 지금의 나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어리던 시절의 엄마의 노트에는 사랑 시와 청춘의 흔들림 같은 구절이 가득하다. 보통 새해 노트의 첫 페이지는 다짐과도 같은 글들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엄마의 노트의 첫 장은 ‘김남조 시인’의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쓰여 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할 건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되십시다.


엄마에게는 청춘으로 쓰인 시간을 넘어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엄마가 되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항상 사랑이 존재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명절에 노트를 챙겨가 같이 펼쳐 놓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와야지 싶다. 아직 오지 않은 일들에 불안하기 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지금을 나누며 기억을 더해 나가길 바라본다.



UNIT 16. 이야기를 건네는 물건

NAME.   1976년 엄마의 노트 (보수, 재제본)

FROM.   한국

SINCE.   2024

PRICE.   2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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