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 PROJECT ARCHIVE
성인이 된 이후로 줄곧 향수를 써왔으니 20년이 넘어서고 있다. 성년의 날 받았던 향수가 첫 시작이었는데, 당시 여성들에게는 꽤나 인기가 있었던 ‘겐조(KENZO)’의 ‘플라워바이겐조(Flower by Kenzo)’를 받았던 기억이다. 길쭉하고 얇은 병 위에 꽃의 패턴이 이뻐서 화장대 위에 올려 두고 제법 성인 여자의 화장품이란 이렇지 하면서 열심히 뿌리고 다녔다. 이후로는 ‘캘빈클라인(CALVIN KLEIN)’의 ‘CK ONE’ 향수를 커플로 사용해 본 기억도 있고, 나의 취향보다는 타인이 생각하는 나에게 어울리는 향을 선물받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향에 대한 선호가 명확히 있지는 않았다. 다만 순간 아! 하고 머리가 아프다 싶은 향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았다.
향수에 대한 선호가 생기기 시작한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다. 출장이 잦은 환경 탓에 면세점을 비롯해 이렇다 할 해외 백화점들을 돌아다닐 기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시장조사를 핑계로 이런저런 개인의 취향 실험이 이뤄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주변에 향수를 사용한다는 친구들은 거의 ‘샤넬(CHANEL)’의 ‘N°5’는 한 병씩 다 소유하고 있을 만큼 대표적인 향수였는데, 내 취향에서는 살짝 비켜갔다.
대신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된 향수는 같은 브랜드의 ‘N°19’이었다. 지금도 꾸준히 함께하고 있는 향수기도 하다. 샤넬의 설립자인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의 생일인 1883년 8월 19일로부터 유래한 이름이다. 여성의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을 대표하는 브랜드지만 N°19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좀 더 진취적이고 액티브한 느낌이 강하다. 탑, 미들, 베이스 노트를 구분해 향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잔향에 따라 여러 가지를 믹스해 쓰기도 하는 향 마니아는 아니다. 첫 느낌에 너무 가볍게 들뜨지는 않지만 적당한 풀 향과 흙내가 좋다. 중성적인 느낌의 향이라는 생각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남겨지는 꽃 향도 어느 정도 있어서 좋고 싫음이 확실히 있는 향이지만, 나는 매우 좋음에 가깝다. 오리지널이 가진 향이 더 중성적인 느낌이 강한데, 국내에서는 아마 파우더리한 내음이 더 가미된 뿌드르(Poudre) 버전이 인기도 많고 구하기가 수월하다. 한동안 재료 수급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국내 매장에서 오리지널 구입이 안됐던 시기도 있었다.
1970년에 출시했던 향수가 가장 인기를 끌었던 시기는 1990년대에 들어서다. 비즈니스 우먼에 대한 이미지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로, 이전의 보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점차 독립적 이미지가 강조되었는데, 전문성을 강조하는데 패션 스타일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어깨가 크게 강조되는 파워슈트는 1980년대부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캐주얼한 비즈니스 스타일이 많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강인하고 독립적인, 그리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상징하는 향도 같이 주목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패션이 주는 이미지만큼 향이 주는 이미지도 강하다고 생각한다. 향을 입는다는 표현도 잘 사용하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옷의 스타일보다는 향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옷은 오히려 덜어져서 최소화하고 있고 가능하면 계절의 구분 정도일 뿐 트렌드라는 것을 크게 타지 않는 옷을 오래 두고 입는 방향으로 점점 취향이 고정되고 있다. 다만 향은 하나 둘 늘어가고 있는데, 주로 사용하는 N°19 외에 ‘바이레도(BYREDO)’의 ‘블랑쉬(Blanche)’를 비롯해 ‘산타마리아노벨라(SANTA MARIA NOVELLA)’의 ‘아쿠아 디 콜로니아, 에바(Acqua de Colonia, Eva)’를 같이 두고 쓴다. 계절의 느낌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외출할 때의 차림이나 그날 마주치게 되는 상대에게 주고 싶은 향의 느낌에 맞춰서 사용하는 편이다.
냄새에는 기억이 있다. 누군가와의 만남에 첫인상을 결정짓기도 하고, 지나간 추억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내리는 커피의 향이 하루의 기분을 만들기도 하고 지나치는 풀꽃 향에서 엄마의 분냄새를 느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남기고 싶은 모습의 향을 오늘도 하나 골라 바르고 나선다. 오늘의 향은 깨끗하지만 포근한 비누의 향이다.
UNIT 14. 인상을 남기는 물건
NAME. 샤넬(CHANEL) N°19 오 드 빠르펭 (100ml)
FROM. 프랑스
SINCE. 1970
PRICE. 25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