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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mBom Mar 30. 2024

UNIT 17. 삶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

MONO PROJECT ARCHIVE

어린 시절에도 인형을 가지고 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에너지가 넘쳤던 나는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놀이터를 옮겨 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고 공기놀이에 고무줄놀이도 흙바닥에 주저앉아 하는 것이 익숙했다. 유치원 입구에 있던 동상에 마법이 걸려 있다며, 이 마법을 풀어주려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게임들이 있다는 말로 유치원 곳곳을 돌아다니면 게임들을 만들어가며 놀았다. 여자아이의 생일이면 다들 곰에 토끼에 인형들을 쥐여주는 게 당연했던 분위기였지만, 대신 블록을 사달라고 말하던 어린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넘어가면서 주변의 친구들은 학원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비슷한 걸 배우는 친구들끼리 다시 놀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열심히 다니던 피아노 학원은 그만둬야 했고, 어쩌다 보니 학교가 끝나면 영어 학원에 가서 앉아있어야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영어를 배우고 취업을 하겠다며 목을 매던 토익 점수로만 보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게 이상할 정도지만, 역시나 눈으로 읽고 업무 메일은 써도 외국인 앞에서 말도 못하고 멋쩍게 웃고 마는 건 학교와 다름없는 분위기의 학원에 모여 앉아 경쟁적으로 시험을 보고 매일매일 성적을 학원 벽에 붙이던 이상한 공부법에 대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기에 익숙했고 바비 인형 옷장에 아이템을 하나씩 모으며 옷 입히기에 열중하던 친구들이었다. 이전까지 바비인형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인형을 사달라고 말했던 것 같다. 누군가와 어울리기 위해서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져야만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깨달은 것 같다.


애초에 큰 관심이 없다 보니 유일한 바비인형의 긴 머리가 맘에 들지 않아 짧게 자른 머리를 만들었던 행동에 친구들을 비롯해 선생님도 놀랐고, 그 일로 내가 괜찮은 거냐며 담당 선생님은 부모님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요청했다. 다행히 나의 부모는 우리 딸 눈에는 짧은 머리가 이뻐 보였나 보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줬고, 그즈음 생일에 엄마는 나에게 회색빛이 더해진 핑크색 곰돌이 인형을 선물했다.


목에 핑크 리본이 달려 있는 앉은키 20cm 남짓의 곰돌이 인형이었다. 털이 뻣뻣한 거 보면 값나가는 곰인형은 아닌 거 같은데, 사람의 형상이 아닌 곰돌이 인형에 엄마, 아빠, 친구들에게 못 털어놓는 고민도 들어주는 곰인형이라는 말을 해줬다. 내심 나의 행동이 걱정이 됐었던 이유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엄마에게 받은 곰인형이 유일하게 나에게 남아있는 장난감이다. 애착의 물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애정을 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사를 할 때마다 항상 따라다니며 내 공간 어딘가 자리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침대 옆에 항상 있었고 대학교 시절은 책상 한편에, 이후로 혼자 살게 되면서는 정해진 위치는 아니어도 방 어느 한곳에 올려두었다. 물건을 쉽게 버리는 성격에 이 정도 시간을 곁에 두고 살았다면 그것 역시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엄마가 원하는 쓰임으로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로 사용된 적은 없다. 성인이 되는 어느 시점까지 고민이라고 할 만큼의 감정적 동요나 삶의 굴곡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 물론 겪어야 할 시기를 한참이나 넘어 뒤늦게 온 사춘기로 20대의 초반을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로 지나왔다. 여러 기회로 최근에 어린 시절의 나와 그리고 지금의 나의 마음이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왔는지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잘 발견해 주지 못했던 나의 마음 안의 아이가 그 시절 느꼈을 마음들도 하나씩 들여다보려 하는데, 문득 곰돌이 인형의 존재가 다시 눈에 들었다. 특별하게 기억할 사건들은 없지만,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면서 내 변화를 제일 많이 관찰한 존재이자 차마 버려지지 않는 마음의 부적 같은 존대로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UNIT 17. 삶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

NAME.   핑크색 곰돌이 인형

FROM.   한국

SINCE.   1994

PR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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