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삶의 현장 승무원편
혈육의 퇴사를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혈육이 일하는 비행기를 타고 레이오버를 따라갈 기회가 생겼다. 그간 스탭 티켓으로 여러 번 혼자 타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과 함께 타기도 했지만, 혈육이 일하는 비행기를 승무원과 손님의 입장에서 타 본 적은 없었다. 혈육의 항공사에서 몰타 노선을 신규 취항하면서 퇴사 전 몰타를 가보겠다는 의지에 불탄 혈육이 스케줄 신청을 몰타에 몰빵해 결국 받아냈고, 마지막으로 중동 숙소에서 머물다 함께 몰타 비행도 따라갔다 오자는 꼬드김에 내가 순순히 넘어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몰타를 한번은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는데 혈육 찬스로 이렇게 빨리, 쉽게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블루라군도 가보고 호캉스도 할 생각에 신이 나 있었는데 막상 출발일이 다 와 가니 혈육이 일하는 비행기를 탈 생각에 살짝 긴장도 되었다. 어쨌든 일터는 전쟁터니까. 혈육이 너무 힘들게 일하지는 않을지, 누군가 마침 컴플레인이라도 걸어 곤혹에 처하지는 않을지, 혈육의 동료들도 있으니 나도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다 등등 지레 걱정도 되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여차하면 함께 뚜까패겠다는(!) 심정으로 호기심과 설렘 반, 비장함 반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당일 가는 편에서 혈육의 포지션은 비행기 뒤편의 갤리여서 승객 구역에서 서비스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고. 갤리도 내내 바빠서 가서 말을 걸 분위기도 아니라 내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대신 그날 서비스를 담당한 혈육의 동료들이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서비스 중간에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말을 걸어주고 친절하게 챙겨주었고, 비행기의 사무장도 비즈니스에서 웰컴 샴페인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식사 서비스가 모두 끝나고 비로소 조금 여유가 생겨 갤리로 가서 혈육과 사진도 찍고, 동료들과 이야기도 하며 승무원들의 업무 공간을 엿볼 수 있었다. 혈육의 말처럼 중동에서 유럽 비행은 비행시간도 짧고 시차도 없어 상대적으로 쉬운 비행에 속하는 데다, 몰타는 신규 취항지에 레이오버도 길고 작은 기종으로 가서 승객도 적어서 그런지 승무원들도 모두 여행이라도 가듯 들뜬 모습이었다. 다들 여유 있는 모습으로 가족으로 따라온 나에게도 호의적이어서 따라가기 좋은 비행이었다.
몰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날, 기장도 가족이 따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왜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할 때 크루버스를 같이 타지 않았냐고 할 정도로 친근한 분위기였지만 어쨌든 그들은 일하는 중이고 브리핑도 해야 하니 그렇게까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이동은 따로 했다. 돌아오는 비행에는 혈육이 기내 서비스를 담당해서 나는 뒤편 좌석에 앉아 열심히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주었다. 다행히 왕복편 모두에서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친절한 승객과 동료들 덕분에 몰타뿐만 아니라 비행 자체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오며가며 혈육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드는 생각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물론 일은 힘들어 보였고 그날 보이지 않은 고충도 많겠지만 한평생 같이 살며 혈육의 성향을 잘 아는 나로서는 기내에서 일하는 혈육의 모습을 보는데 일의 성격 자체가 잘 맞아 보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반대로 나에게는 한때 꿈꿨던 목표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신의 뜻이라 느낄 만큼 지금의 내가 싫어하는 것들의 총집합 격인 업무 환경이었다. 수많은 사람과 환기 안 되는 좁은 환경, 무거운 걸 계속 다뤄야 하는 것,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것, 말 많이 해야 하는 것 등등. 물론 어릴 때 되었으면 외국 다니는 건 좋아하니 그걸 원동력 삼아 어찌저찌 버티긴 했겠지만.
일 얘기는 혈육에게서 많이 들었고 모습이 대충 그려지니 굳이 일하는 비행기에 타보지는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타보니 이야기로 듣는 것과는 또 다르게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퇴사 전 추억이 될만한 사진과 영상도 많이 남겨줄 수 있었고, 승무원의 업무 공간을 가까이에서 엿본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혈육과 함께한 비행은 나와 혈육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승무원의 가족이 계신다면 기회가 되면 한번 타보시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