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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Oct 23. 2019

심심하지 않아요. 바인더가 있으면

첫 번째 인터뷰이. 약사&직장인 이은희 (1/2)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 Carl Becker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라고 했다. 인터뷰 매거진 《손으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손으로 직접 기록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첫 번째 인터뷰이는 예전에는 약국에서 약사로, 현재는 제약회사 학술팀에서 일하고 있는 이은희님을 만났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을지로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서 만나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인터뷰는 총 2부로 나누어 실릴 예정이다. 




언제부터 기록을 시작하게 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집에 가면 다이어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쓴 플래너가 다 있어요. 이때 쓴 다이어리는 곧 스터디 플래너였어요. 대학교를 다녔던 스물다섯까지 10년 넘게 꾸준히 썼어요. 2016년도에 졸업하고 나서는 스터디 플래너가 필요 없어져서 다이어리를 사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하루라도 빼먹는 걸 싫어해서 6개월 동안 매일매일 기록했어요. 그런데 하루의 마지막. 저녁에 일기를 쓰다 보니 '오늘은 이래서 힘들었다', '오늘은 이 사람이 너무 싫었다', '환자가 나를 너무 괴롭혔다' 등 안 좋은 이야기들만 가득하더라고요. 분명 오늘 뿌듯한 일도 있었을 텐데 항상 부정적인 내용으로만 끝나는 날이 많다 보니 6개월이 지나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힘들여가면서 썼는데 바뀐 게 뭐지? 내가 왜 일기를 쓰고 있지?" 그래서 지금 일기는 따로 쓰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항상 기록 욕심은 있었어요. 뭔가를 항상 남기고 싶었던 건 있었어요.


직장인이 되고 나서 기록 스타일에는 변화가 있었나요?

스물다섯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업무와 개인적인 내용을 기록하는 비율이 5:5 정도로 나눠져요. 회사에서 학술팀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교육을 듣거나 학회에 참석할 때면 선이 없는 '무지 노트'에 빠르게 적는 편이고, 그렇게 적어놓은 내용을 토대로 회사로 돌아와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 활용해요. 


 예전에 매일마다 '약국일지'를 썼어요. 그때는 약국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종합병원 앞에 있다 보니 워낙 다양한 환자들이 찾아와요. 처방전을 받으면 바로 환자에게 약을 처방해주면서 복약지도를 해야 되는데 제가 모르는 질병이 너무 많은 거예요. 약사는 환자들에게 바로바로 대답해줘야 되거든요. 저는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당황하는 버릇이 있어서 안 되겠다. 환자를 만났을 때 당황했던 거, 환자가 물어봤는데 내가 처음 듣는 거 등을 매일 하나의 키워드를 정해 '약국일지' 노트에 따로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매일 하나의 키워드를 정해 약국일지 노트에 따로 정리했다. 이 날의 키워드는 '가와사키병'이었다.

그녀가 정리한 약국일지 노트를 살펴보다가 생소한 '가와사키병'이 있었다.


'가와사키병?' 이건 어떤 병인가요?

'가와사키병'이 애기들 급성 열성 발진이라는 거래요. 아스피린이 소화 환자에게는 금기인데, 이 환자들에게는 아스피린이 치료제예요. 어떤 애기 환자가 아스피린을 받아왔길래 도대체 이건 무슨 병일까? 하고 질병명을 봤더니 '가와사키병'인 거예요. 그래서 가와사키는 뭐고 무슨 약으로 치료하는구나. 환자를 상대할 때는 이런 점을 알아두면 좋겠다 싶은 내용을 따로 공부해서 정리했어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 번쯤 들어본 적은 있는데 환자를 직접 만나니 무척 생소한 거예요.


알록달록 그림 그려가며 되게 열심히 썼네요. 재밌는 다른 에피소드도 소개해주세요!

그녀는 브린텔릭스(Brintellix)의 부작용으로 '비정상꿈'이 있다고 약국일지에 적어두었다.

 약국에 있으면 되게 재밌어요. 어느 날 찾아온 어떤 환자가 이상한 꿈을 꿨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브린텔릭스 Brintellix)과 그 꿈이 상관관계가 있는지 물어보러 오셨어요. 저는 처음 보는 약이라 대답을 제대로 못했어요. 퇴근 후 저녁에 그 환자 말이 떠올라서 찾아보니 그 환자 말대로 부작용으로 '비정상적인 꿈'이 있는 거예요. (그 환자는 어떻게 알았대요?) 이게 우울증 약이라 정신 신경계 작용하는 약들은 이런 가능성이 조금 있어요.


꼭 왼쪽으로 돌아누워야 한다고 그림까지 그려두었다.

 그리고 이건 관장액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둔 거예요. 관장액은 참았다가 주입하고 10분 넘게 최대한 참았다가 화장실에서 비우면 그동안 못 봤던 변들이 쫙 나오는 건데. 보통 변비 심한 환자들이 관장약을 써요. 그런데 이 날은 궤양성 대장염이라고. 그 염증을 치료하는 관장액이 따로 있어요. 얘는 참고 다시 비워내는 게 아니라, 자기 전에 주입한 다음에 그 상태로 잠을 자야 하거든요. 잘 때는 많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약이 장에 계속 남아서 그런 작용기전으로 염증을 치료해주는 약인데 제가 모르고 환자한테 '그건 5분 참으셨다가 화장실에서 비우세요'라고 복약지도를 잘못한 거예요. 


 그 날 뭔가 찜찜해서 집에 가서 찾아보니까 제가 복약 지도한 방법이 틀린 거예요. 변을 보고 싶은 자극이 일어나는 경우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으라고 해야 되는데 저는 화장실을 가라고 한 거죠. 깜짝 놀라서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제가 잘못 알았다고. 전 날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다시 복약 지도해줬던 기억이 나요. 이게 정말 신기한 게 오른쪽으로 누우면요. 장의 구조상 관장액이 안쪽 깊숙이 못 들어간대요. 왼쪽으로 누워야 장 안쪽까지 깊숙이 잘 들어가야 작용을 잘해서 이 액으로 관장할 때는 무조건 왼쪽으로 누워야 해요.


이렇게 정리해놓으니까 효과가 있었나요?

다음에 또 비슷한 환자가 오면 자신감이 붙어서 아는 건 다 말하고 (웃음) 이렇게 한 번 정리해두니까 쉽게 안 잊혀지더라고요. (완전 사전이나 다름없네요. 그렇지만 정리한 내용을 다시 찾아야 할 때 불편하지 않나요?) 맞아요. 저한텐 이게 약국 사전이나 다름없어요. 손수 적다 보니 검색 기능은 없어서 불편하긴 해요. 그렇지만 어렵게 배워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정리하는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려요. 덕분에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아요. (웃음) 약국에 근무할 때 모르는 질병을 노트에 정리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다이어리 대신 특별히 바인더를 쓰는 이유는?

바인더는 (다이어리에 비해) 조금 더 체계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날 이 시간에는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거고. 체계적으로 모든 일정을 담을 수 있는 반면에 예쁜 디자인만 보고 사는 다이어리는 하루 네모칸. 이렇게 끝이잖아요. 결국 그 공간을 내가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데 매번 쓸 때마다 오늘은 뭘 써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때는 예쁜 스티커를 사서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대충 쓰면서 그 칸을 채워야 한다는 게. 쓰는 김에 이왕이면 잘 쓰고 싶고. 쓰다 보면 또 꾸미기에 욕심이 생기니까 잘 쓰려고 하는 마음이 들어 오히려 잘 안 쓰는 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때 때마침 페이스북 피드에서 우연히 바인더의 존재를 알게 되어 궁금해서 책이나 블로그를 찾아보다가 나랑 잘 맞을 거 같아서 쓰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넘게 꾸준히 다이어리를 썼지만 끝까지 쓴 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바인더를 쓰니까 달라진 점이 있던가요?

 바인더를 쓰기 전까지는 매년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고 한 달 열심히 쓰고 그만두고 항상 반복이었어요. 올해는 이게 예쁜데? 그렇게 디자인이 예쁜 다이어리를 샀으나 단 한. 번. 도. 끝까지 써본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열심히 쓰다가도 중간에 공백이 생기면 다시 시작할 때 비워져 있는 그 공백이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고. (웃음)


물론 바인더도 처음에는 다이어리처럼 쓰다말다를 반복했어요. '결국 나랑 안 맞는 건가..' 싶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제 생일선물로 가죽 바인더를 하나 질렀어요. 돈을 쓰면 그래도 좀 쓰지 않을까 싶어서. 물론 그래도 쓰지 않았답니다. (웃음) 하지만 비싼 돈을 줬기 때문에 써야겠다는 마음 한 켠에 짐이 계속 남았고 우연히 온라인에서 위클리 인증하는 모임을 찾아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쓰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곧 연말이잖아요. 회사에서 연말 평가를 시작했는데 이때 지금까지 제가 했던 모든 업무 내용을 알고 있으면 작성하기 편하잖아요. 저희 팀에서는 엑셀로 만든 주간업무일지를 매주 작성해서 팀장에게 보고하는데 다른 동료들은 따로 기록해놓은 게 없으니 그 업무일지를 통해서만 올해 처리했던 업무를 되돌아봐요. 그런데 사실 업무일지라는 게 보고하기 위해서 한 줄로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보고서라서 지금 와서 본다고 디테일하게까지 뭘 했는지까지 제대로 기억이 안 나요. 예를 들면 3월 12일에 뭐 했는지 모르고, 그냥 그 주에 뭐했구나 정도만 아는데. 저는 바인더를 보면서 3월 12일에 어떤 문의를 받아 3월 15일에 논문 하나를 보내줬구나. 정확히 기록되어 있어서 연말 평가 자료를 작성하기 무척 편했어요.      



심심하지 않아요. 바인더가 있으면



썼던 내용은 다시 찾아보는 편이에요?

네. 요즘은 업무 때문에. 업무 때문에 찾아보기도 하고 심심할 때 한 번씩 막 이렇게 넘겨봐요. 그럴 때마다 나 진짜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이렇게 적어놓은 게 스스로 뿌듯해가지고. 자주자주 넘겨봐요. 우울할 때는 주로 독서노트도 봤다가 옛날 자료도 봤다가. 심심하지 않아요. 바인더가 있으면. 사진도 붙여놓고 편지랑 쪽지도 붙여놓고 다 추억이어가지고. 보면서 이게 벌써 몇 달 전이구나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지금까지 작성한 게 뿌듯해서 열심히 넘기고 있는 은희님


바인더는 다른 사람(친구들이나 회사 동료)한테 보여준 적 있어요? 

네. 보여준 있어요. 그런데 관심. 진짜 열심히 쓰네 하고 끝. (여자분들 다이어리 쓰는 거 관심 많지 않아요?) 제 주변에만 그런지 몰라도 다들 관심이 없어요. 예전에 다이어리를 쓸 때 스티커 사러 다닐 때도 친구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죠. 저걸 왜 사. 


"카페에서 바인더 정리할 때가 일주일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기록은 주로 언제 하세요?

업무 내용은 근무 시간에 틈틈이 적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바인더를 보여주기 조심스러워요. 바인더에 개인적인 내용도 있다 보니 아무래도 회사에서 개인적인 기록은 자체적으로 생략하게 되더라고요. 혹시라도 누가 보면? 회사에서 누가 막 내꺼 보면? (웃음) 개인적인 내용과 업무 내용이 양립하는 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대신 일요일에는 카페에 가서 바인더를 정리하고, 미뤄두던 독서노트를 정리하면서 3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요. 이때가 일주일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인터뷰는 2부에서 계속됩니다.


1부. 심심하지 않아요. 바인더가 있으면

2부. 정말로 좋아서해야 꾸준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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