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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절은 없었다

5월 말, 나는 전등사에 입사했다.
부처님오신날이라는 큰 행사가 막 끝난 시점이었다.
첫날, 직원들 회식 자리에 참석하면서 전등사에서 함께 일할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절에도 이렇게 많은 직원이 있다고?"


약 30명 정도 되는 직원들이 절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막내가 되었다.


KakaoTalk_20250221_181323911.jpg 직급조차 없는 나의 명함 ㅋㅋ


속세에서는 책임, 과장이라는 직급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막내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위계가 확실한 이곳에서, 나는 다시 가장 아래에 서 있었다.
익숙하지만, 또 낯선 감정이 들었다.


젊었을 땐 이직을 자주 했던 탓에, 나보다 어린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경험이 많았다.
하지만 IT업계 특유의 수평적인 문화 덕분인지,
나이와 직급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절에 들어오니 기분이 달랐다.


이게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절이라는 공간의 상하관계가 더 분명해서 그런 걸까?


막내가 된 나는 제일 먼저 출근해서 사무실 문을 열고, 청소를 했다.
매일 청소업체가 다녀가던 사무실에서 일하던 나였는데,
이곳에서는 출근하자마자 직접 쓸고 닦아야 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막내니까." 라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불교에서는 ‘하심(下心)’이라는 말을 쓴다.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



KakaoTalk_20250221_180619450.jpg 매일 아침 10시. 유튜브 라이브를 한다


나는 하심하는 마음으로 사무실을 청소했다.
절에서 일하면 고요하고 평온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소리가 들리고
푸르른 산속에서 여유롭게 일할 줄 알았다.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시며 명상을 하고,
고요한 사찰에서 느릿느릿한 하루를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매일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왔다.
주말에는 남문과 동문에 있는 그 넓은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도 접수를 하러, 절에 대한 문의를 하러, 종무소로 몰려들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렸고,
방문객 응대는 끊이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를 유튜브로 촬영하는 날도 있었고,
나는 각종 제사와 행사 준비를 돕느라
책상에 앉아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절에서 일한다’는 말만 들으면,
다들 내가 명상하고, 한적한 산속에서 조용히 지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유명 관광지 직원이었다.


"대웅전은 어디예요?"
"기도 접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주차는 어디다 해야 해요?"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고,
나는 놀이동산 스태프처럼 절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응대했다.


'이게 절인가… 놀이공원인가…?'


차분했던 삶은 없었고
매일 빠른 걸음으로 사찰을 누비고 다녔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이렇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것.


답답한 사무실에서 모니터만 바라보던 지난날과 달리,
나는 매일 탁 트인 산속을 걸으며 일했다.


공양간으로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인천의 풍경,
대웅전 앞에서 맞은 부드러운 바람.
매일 만나는 문화재들.



KakaoTalk_20250221_180640018.jpg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멀리 인천이 보인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절에 온 기분이 들었다.


바쁘긴 했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이 순간들이,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분명 속세의 사무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문득문득 ‘여기서 일하기 참 잘했다’ 싶을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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