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프롤로그 9
제과공장에서 일할 때 매일 05:30분 첫차를 타고 출근했다.
사람마다 근무형태가 다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첫차부터 자리 차지하기 눈치싸움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대체로 나에게 '첫 차'는 택시 탈 돈으로 술을 마시기를 선택하는 '젊음의 객기'였다.
하지만 이제 나의 '젊음의 객기'를 출근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제법 성장 한 것 같아 뿌듯해졌던 순간이다.
공장에서의 노동이 익숙해졌을 때 나는 다시 워킹 홀리데이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틈틈이 찾아본 블로그와 유튜브를 봤을 때 시티에 머무르면서 외국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터가 '카페'라고 했다.
한국에서 카페에서 일한 경력이 오래되기는 했지만 나는 사실 커피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커피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포션을 얻기 위한 곳이니 그저 샷을 빨리 내리고 얼음컵을 빨리 푸면 됐다.
하지만 뉴질랜드는 다 쓰러져가는 구멍가게 같은 카페도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고 발에 치이는 게 커피 잘 타는 바리스타들이었기에 지금 나의 경력과 실력으로는 바로 뉴질랜드에서 길바닥 신세였다.
그렇다.
자신이 없으면 어쩌겠는가?
자신을 채워야지.
그래서 예전부터 막연하게 커피를 배워보고 싶었는데 앞으로 커피 자격증이 있으면 나쁠 것도 없고 커피 연습도 할 수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옳다구나 하고 일시불로 130만 원짜리 커피 학원을 등록했다.
(사실 제가 팔랑귀에 대문자 P인데 상담해 주신 선생님이 말을 너어어어무 잘해서 홀라당 넘어가버렸어요.)
그리고 단 한 줄로 130만 원을 투자한 커피 자격증에 대한 후기를 남길 수 있다.
"커피 여전히 전혀 모르겠다."
예전에 일하던 카페에서 손님이 커피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시 뽑아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손님이 그런 말을 했었다.
"커피는 기호식품이라 사람마다 입맞이 달라서 참 어려워요~"
그 당시에 나에게 그 손님은 그저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진상손님이었기에 빨리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 그 손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커피는 기호식품이고 사람마다 느끼는 향과 맛이 정말 다르다.
나에게는 그저 잠을 깨우는 씁쓸한 카페인 물에 불과한게 누군가에게는 초콜릿 향과 맛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과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게 커피라고 누가 상상이나 해봤는가.
심지어 나는 커피 학원에서 센서리(Sensory) 수업을 듣는데 몰래카메라 당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이 내려준 커피를 시음하면서 서로 느껴지는 맛과 향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속으로
'음~ 가벼운 커피 맛~' , '음~ 진한 커피 맛~'
이게 끝이었다.
그런데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은 이건 체리 맛, 캐러멜 맛, 꽃향기 등등 다양한 맛과 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후 선생님이 답을 알려주는데 나는 또다시 속으로
"이게 과연 사회적으로 합의된 향과 맛이 맞나?"
싶었다.
그 후로 나는 커피의 맛과 향이 이해가 잘 안돼도
"이건 커피 사회에서 합의 본 것이기에 너는 그냥 기억하면 된다."
하며 자기 세뇌를 했다.
백 단위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커피를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다.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커피는 이렇다.
이 하늘 아래 맛없는 커피는 없다.
내 입맛에 맞느냐 안 맞느냐의 문제다.
그러면 커피콩을 볶는 커피 로스터나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결국 손님들에게 자신의 커피 아이덴티티(커피 맛)를 설득했냐 못 시켰냐의 문제로 나는 이해했다.
연극을 할 때면 팀원들끼리 항상 의견이 부딪히는 부분이 바로 이거다.
지금 우리가 준비하는 공연의 의도와 목표가 '관객들을 설득, 공감' 시킬 수 있는가?
이것 때문에 그렇게 박 터지게 서로를 설득하고 의심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근데 그게 커피에도 똑같을 줄이야….
학원에서는 어떤 커피가 좋은 커피고, 어떤 커피가 나쁜 커피라고 가르쳐 줬다.
하지만 좋고, 나쁜 커피를 나누는 것보다 커피를 통해 손님들에게 내가 어떤 맛을 전하고 싶은지에 대한 커피 아이덴티티가 더 중요한게 아닐까라는 물음표가 생긴 과정이었다.
과연 나는 나만의 '커피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을까?
(우선 지금까지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커피는 어떤 맛과 향 또는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나요?
저는 옛날에 정말 우연히 스페셜티(커피)를 마셨는데 그때 커피에서 '복숭아' 맛을 느꼈어요.
센서리 노트에도 복숭아가 쓰여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쓰여있어도 저는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그때 마신 스페셜티는 뜨거운 햇빛을 듬뿍 머금고 올라온 복숭아의 달콤함과 향기 그리고 연분홍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느껴봤어요.
당시 저한테는 그게 정말 큰 충격이었고 막연하게 제가 커피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도 그 스페셜티 때문이었어요.
앞으로 제가 커피를 볶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아마 저는 그때 느낀 맛과 향을 쫓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커피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것이 정말 중요한 분야인 것 같아요.
손님들의 입맛을 다 수용할 수는 없으니 나의 기준점이 곧게 잘 서있고 그 기준점을 토대로 가지치기해서 쭉쭉 뻗어 나가야 하는데 저는 여전히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라 참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