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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Jul 21. 2022

새로운 에피소드 속 단역1은 지하철에서


 몇 달 전 이사를 한 이후로 함께하는 경의선의 출근길은 언제나 발 디딜 틈 없는 만원이다. 경의선은 배차 간격이 길어 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열차와의 약속을 하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간에 맞춰 열차를 반드시 타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싸움과 눈치싸움이 난무한다. 복잡하고 치열한 이 공간에서는 이틀에 한 번꼴로 출퇴근길에 꼭 싸움이 난다.


 속이 메쓱거리던 날 아침, 어김없이 출근길 경의선을 탔다. 무더운 여름날, 열차 내 에어컨이 고장 났는지 겨우 끼어 탄 칸이 후덥지근했고 승객들은 땀에 찐득해진 몸을 서로 맞붙인 채 불쾌함을 꾹 참고 있었다. 나도 옆 사람과 맞닿은 팔에 땀이 차지 않도록 토끼 손 선풍기로 부지런히 가냘픈 바람을 쐬어주고 있었다.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열차로 몸을 욱여넣었다.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타려던 순간, 먼저 타있던 남자가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몸으로 살짝 그를 밀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그는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다시 몸을 밀어 넣었고 간신히 문이 닫힌 열차는 다음 역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얼굴을 코앞에 마주한 채 둘은 서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워 서로 숨소리조차 들릴까 숨죽이는 만원 열차 안에서, 기분이 나빴던 그는 자신을 밀친 사람에게 나지막하지만 모두가 들릴 듯한 목소리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불편한 상황은 환승역인 왕십리까지 10분가량 계속되었다.

 

 울렁울렁.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가슴이 갑갑하고 속이 불편하다 싶었는데 좁은 열차 안에 끼어 후끈한 열기를 느끼는 상황에서 불편한 상황까지 보고 있으려니 숨까지 가빠졌다. 환승역에 도착할 때쯤엔 식은땀까지 났다.

 환승역에 도착하자마자 열차는 사람들을 와르르 뱉어냈다. 밀쳐지듯이 플랫폼에 툭 던져지니 기진맥진한 상태라 숨을 고르려 잠시 서있으려 했지만 사람들에 밀려 다음 환승을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다들 무엇을 위해 이러고 살고 있나?'



 갑갑함과 메슥거림을 해결하기 위해 약국으로 가서 천황보심단을 여러 포 구매했다. 천황보심단은 만성 불안과 갑갑함을 해결해준다는 약으로, 급격하게 긴장과 불안을 낮춰주는 청심환과는 다르게 만성적인 불안에 효과적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한 포를 뜯어 입에 털어 넣었다.

 전쟁을 치른 듯한 기분으로 손에 쥔 약을 들여다보니 스스로 해소가 어려울 땐 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정이 거의 마무리되었고 이제 마음이 좀 편해졌다 싶었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걸 보니 불안이 만성이 된 건가 싶어 걱정도 되었다.



 천황보심단은 일주일 정도 먹는 게 좋다고 해서 이후 아침 공복에 꾸준히 먹었다. 기분 탓인지 약을 먹고 나면 오후에는 증상이 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약을 가방에 챙겨 다니며 주변에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먹어보라고 쥐어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두근거림과 갑갑함은 여전했지만 약을 먹고 나면 오후에는 괜찮아졌기에 천황보심단의 효과를 믿기 시작했다.





 약을 먹은  일주일째 되던 , 동료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최근 먹고 있는 영양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동료에게 요즘 매일 먹는 멀티비타민과 칼슘 얘기를 하며  출근 전에 잊지 않고 한알씩 챙겨 먹는다고 했다. 동료는 '빈속에 비타민을 먹는다고?' 하면서 공복에 먹으면 속이 쓰리거나 불편할  있다고 말했고, 그제야 나는 문득 갑갑함과 메스꺼움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과 만성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천황보심단을 먹기 시작한 시기가 같다는  인지했다.

 

 그렇다. 내가 느꼈던 증상은 공복에 멀티비타민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것이었다. 공복에 멀티비타민을 먹으면 속이 쓰릴  있는데 멀티비타민을 비롯해, 공복  먹으면 위장장애가 생길  있다는 칼슘까지 부지런히 챙겨 먹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부터 공복에 영양제를 먹는 것을 멈추었더니 출근길  이상 울렁거림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레 천황보심단을 먹는 일상도 멈추었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느냐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번에 나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경험을 했다. 한동안 일이 매우 바쁘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속이 불편해 밥을 잘 못 먹거나 불안함에 가슴이 답답한 때도 있었다. 그러다 여유가 생긴 지금조차 나타나는 증상들의 대부분을 스트레스나 불안 때문일 거라고 당연시하며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증상들은 실제로 스트레스를 느끼던 때와 비슷한 모습들을 보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불편하고 숨이 가쁘고....


 전혀 의심 없이 마음의 병일 거라 생각했던  단순히 멀티비타민 때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몸은  이상 비슷한 모습들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보면 지레 먹는 걱정과 불안이 마음의 병을 키우고 악화시킨다는  맞는  같다.

 마음의 불안이 있다고 느낄 때에는 나를 몰아붙이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멈추고 쉬게  주어야겠다는 마음에 잠도  자고 가볍고 재밌는 것들만 보며 지냈다. 다행히 마음의 병이 완치되었음을 진단하고  이후로는 다시 열정의 채찍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마음의 꾀병(?) 나았으니 이제 다시 불타는 여름을 보내야지. 진짜 마음의 병이 찾아올 때는 언제든 조급함 없이   있도록.





https://youtu.be/vORDkdgLzEs


아이유가 스무 살 무렵 작곡을 했다는 노래인데 가사를 들어보면 그 나이의 가수가 직접 썼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아련하고 씁쓸하다.



나도 한때는 그이의 손을 잡고

내가 온 세상 주인공이 된 듯

꽃송이의 꽃잎 하나하나까지

모두 날 위해 피어났지

올림픽대로 뚝섬 유원지

서촌 골목골목 예쁜 식당

나를 휘청거리게 만든

주옥같은 대사들

다시 누군가 사랑할 수 있을까

예쁘다는 말 들을 수 있을까

하루 단 하루만 기회가 온다면

죽을힘을 다해 빛나리


언제부턴가 급격하게

단조로 바뀌던 배경음악

조명이 꺼진 세트장에

혼자 남겨진 나는

단역을 맡은 그냥 평범한 여자

꽃도 하늘도 한강도 거짓말

나의 드라마는 또 이렇게 끝나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끝났는지조차 모르게




 세상의 주인공 같던 나이에 이런 가사를   있었던  깊은 감성이 부럽기도 하고 지금에라도 숨겨두었던 보석 같은 노래를 꺼내 주어 고맙기도 하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던 시기를 지나, 어쩌면 나는 주인공 주변의 단역 1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지하철에 몸을 싣고 달리는 직장인 단역1임에 씁쓸해질 때도 있지만 세상의 주인공은  되어도  드라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라는  잊지 말고 오늘도 새로운 에피소드를 써나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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