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까지 살던 집 뒤로는 커다란 밤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면 실한 알밤을 내주던 밤나무. 우리의 가을은 '밤'으로부터 찾아왔다. 달큼하고 노릇한 찐 밤으로부터. 우리는 밤이 떨어져야 진짜 가을이라 믿었다.
알밤이 떨어질 때면 아침마다 커다란 손전등을 하나씩 들고 언니와 밤을 주우러 갔다. 밤나무는 윗집과 우리 집의 경계에 있었다. 모든 경계에 선 것들은 자칫 다툼의 대상이 되기 쉽다. 커다란 밤나무가 세 그루나 있어 제법 많은 밤을 떨구었지만 윗집 어른도 우리 집 어른도 그 밤을 먼저 털어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경계에 있던 밤나무의 떨어진 밤은 모두의 것이었기에 어쨌든 먼저 일어난 자의 차지가 되었다. 언니와 내가 주워온 밤은 국대접 한 그릇, 어떤 날은 그보다 적고 어떤 날은 그보다 많았다. 바람이 불거나 밤중에 비가 온 날이면 평소보다 몇 배를 줍기도 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우리는 벌레 먹은 밤도 알이 굵으면 주웠다. 그 부분은 도려내면 나머지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워온 밤을 어머니에게 맡기면 가마솥에 밥이 뜸 들 무렵 그릇째 넣어 쪄 주곤 했다. 엄마는 찐 밤을 한 개도 먹어보지 않고 언제나 그릇째 우리에게 내주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밤을 간식 삼아 종일 시시때때로 먹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날마다 밤을 주우러 간 건 자발적이었다. 나는 자매들 사이 서열이 가장 낮아 그냥 언니들이 그랬으니까 나도 따라 그렇게 했다. 그 시절 밤을 주웠던 일은 열 살 무렵이었는데도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 밤송이가 벌어져 알밤이 떨어질 때면 이른 아침에 30분 정도 풀숲을 헤치며 밤을 줍는 것은 가을날 일과 중 하나였다. 나는 그때 잠이 덜 깬 상태로 밤을 주우러 가기도 했다. 밤을 줍다가 다람쥐나 청설모를 더러 만나기도 했는데 당시엔 동물의 양식을 사람이 먹는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땐 숲의 동물들보다 어쩌면 우리들이 더 배가 고팠는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 열매들은 사람과 산짐승 모두의 것이었다.
얼마 전, 폭우가 지난 후 산책을 하다 알이 차지 않은 떨어진 밤송이를 발견했다. 가을에 떨어진 밤송이도 알이 차지 않은 밤송이는 겉만 봐도 쭉정이가 들었는지 대강 알 수 있다. 밤송이 가시가 길쭉하고 통통하지 못한 밤송이도 까봐야 먹을 만한 밤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니 밤송이가 크다고 무조건 열어볼 건 아니다.
잘 여문 밤은 스스로 아람을 벌여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진다. 밤송이가 살짝 벌어진 밤도 익은 밤이다. 하지만 밤송이가 전혀 벌어지지 않은 밤송이는 열어봤자 여물지 못한 밤을 얻거나 쭉정이뿐이다.
그러니 계절에 앞서 비바람에 떨어진 밤송이에 먹을 만한 밤이 들어있을 리 만무하다. 과일은 상처 날까 봐 나무에서 미리 따지만 밤은 떨어져도 상처 날 일 없으니 떨어진 밤을 줍는 것이 밤수확의 정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어린 날, 먹을 게 없던 시절에도 모든 밤들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사는 동네 산책길 몇몇 곳에도 실한 밤나무가 있는데, 가을이 되면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가끔 막대기를 던져 밤을 따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것은 밤이 다 익기 전이라도 자신이 취하려는 이기심에서 나온 행동이다. 주위에 열매 채취 금지 현수막이 걸려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책하다가 내 발 앞에 떨어진 알밤을 줍고 싶은 충동을 나도 제어하긴 어렵다. 길바닥에 떨어진 건, 내가 안 주우면 분명 뒤따라오는 다른 산책자가 줍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밤 줍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의 이기심일지 모른다.
얼마 전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청설모를 발견했는데 청설모는 나무 밑동 옆 땅을 살살 파더니 밤 한 톨을 살짝 묻어 놓고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런데 나보다 앞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주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나와 청설모를 연신 쳐다보더니 청설모가 나무 위로 올라가자 재빨리 그 나무 아래로 가 청설모가 땅에 숨겼던 밤을 꼬챙이로 살살 헤집어 바로 꺼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청설모의 어리석음을 비웃듯 나를 한 번 더 보고 입가에 미소까지 짓는 것이다. 나는 내가 마치 공범자가 된 것 같아 어서 그 길을 지나갔다.
열매 채취 금지 현수막을 걸어봤자 꼬챙이를 든 사람들에겐 소용없는 일이다. 청설모의 열매 저장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이 공원에서 이런 일은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꼬챙이를 든 사람들의 계교에 청설모가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부지런한 청설모는 제 방식으로의 저장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자취를 감췄던 공원 산책길에 청설모가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말이다. 서너 해 사라졌던 청설모가 이 공원에 다시 나타나 보란 듯이 자신들의 열매 채취 저장 방식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당당히 살아가는 작은 움직임의 힘을 다시 또 생각하게도 한다. 나는 청설모를 응원하련다. 이 도시의 공원 산책길 오랜 친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