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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Nov 04. 2019

내향인은 배터리를 충전해야 합니다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9

(어느 수요일 오후)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미안, 오늘은 시간 안 돼. 금요일은 시간 되는데.”
“금요일은 내가 안 되는데...”
“아, 그럼 다음에 봐야겠네...”

어느 평일 오후에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날 저녁에 볼 수 있냐는 연락이었다. 솔직히 다른 약속이 없어서 볼 수 있었지만, 시간이 안 된다고 말했다. 거짓말을 한 셈인데, 평일에는 약속을 잘 잡지 않아서 나름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나는 급한 볼 일이 있지 않는 이상 평일에는 약속을 잡지 않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주말에 잡는다. 상대가 주말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가능하다면 금요일로 잡는다.

월요일부터 목요일은 내 개인 시간으로 둔다. 아무리 조율해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월화수목 중에도 만나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 금요일로 맞춘다. ‘불금’을 즐기려는 거냐고? 아니, 나에게 불금 따위는 없다. 그저 ‘쉬기 위해서’다.

나는 사람 만나는 걸 피곤해하는 내향인이다. 사람을 만나고 나면 진이 빠진다. 생체 배터리가 방전된다. 사람을 만나면 집에 들어가는 데 사용하기 위해 남겨 둔 배터리까지 전부 소모된다. 하루 종일 일해서 이미 지쳐 있는 상태인데, 사람을 만나서 남은 배터리마저 써버리면 집에는 겨우 들어간다. 기어 들어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누굴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소중한 사람이나 편한 사람을 만나면 배터리가 덜 소모된다. 편한 사람을 만나면 즐거워서 몸을 빠져나가려는 영혼을 헤어질 때까지 붙잡아 둘 수는 있다. 하지만 편하지 않은 사람을 상대하면 영혼이 유체이탈이 되고 만다. 대화 시작부터 넋 나간 상태로 대화하게 된다.

이러니 평일에 누굴 만나지 않는다. 금요일도 평일인데 뭐가 다르냐고? 전혀 다르다. 다른 요일에는 사람을 만나서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 잠을 자면, 다음 날 배터리가 덜 충전된 상태로 출근해야 한다. 반면 금요일에 만나고 집에 들어가 자면, 오전 내내 잘 수 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니까. 배터리를 가득 충전할 수 있다.

요지는 이거다.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향인 인 내게 사람을 만나고 안 만나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편한 사람을 만나든 편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을 만나고 나면 반드시 충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향인인 나는 사람에게 기가 빨리니까.




내향인은 사람을 만나고 난 후에는 반드시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 외향인은 사람을 만나서 몸속에 있는 배터리를 충전시키지만, 내향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충전시킨다. 외향인은 혼자 있으면 배터리가 소모되지만, 내향인은 사람을 만나면 소모된다. 그래서 외향인은 누군가를 계속 만나려고 하지만, 내향인은 가능한 한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내향인은 약속을 잡아 놓고도 속으로는 그 약속이 깨지길 바란다. 누굴 만나는 게 피곤한 일이니까. 약속을 잡아서 누굴 만나러 가면서도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었으면 한다. 그래야 배터리가 소모되지 않으니까. 약속이 깨져서 만나지 않으면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향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누굴 만나고 나면 특히 그렇다. 소모된 배터리를 충전해야 하니까. 누굴 만나지 않았더라도 내향인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독의 여유를 즐기는 건 아니다. 그저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내향인은 사람들과 함께 단체로 있으면 정신이 나간다. 얼이 빠진다. 처음부터 정신이 나가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괜찮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이 혼미 해진다. 10분, 20분,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배터리가 소모된다. 시간이 흐른 만큼 가속도가 붙어서 정신이 안드로메다와 빠르게 가까워진다. 내향인은 이런 소모적이고 피곤한 일을 겪고 싶지 않아서, 정신을 온전히 지키고 싶어서 혼자 있는 시간을 그토록 원하는 것이다.

외향인 눈에는 그런 내향인이 은둔 생활을 즐기는 듯 보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은둔 생활을 즐기는 게 아니라, 은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굴 만나면 에너지 소모가 크니까.

내향인의 속사정을 모르는 외향인이 보기에 내향인은 비사교적이고,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잘못된 생각이다. 외향인이 오해하는 그 모습은 오히려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내향인도 누굴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기질상 누굴 만나면 배터리가 방전되기 때문에 사람들과 거리를 둘 뿐이다. 정신 건강과 체력을 유지하는 방법이 외향인과 다를 뿐이지, 결코 이상하거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누굴 만나고 나면 다음 날 무조건 쉬어야 한다. 이틀, 삼일, 연이어 누굴 만나면 기가 빨려서 완전히 녹초가 된다. 설마 내게 저질체력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겠지. 쉬지 않고 수영을 해도 지치지 않는 나이다.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이다. 지난주에 휴가를 가서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수영을 하고 10시부터 3시까지 관광지를 구경한 후에 숙소로 돌아와 7시까지 수영을 했다. 이틀 동안 말이다. 그렇게 놀았는데도 피곤하기는커녕 오히려 생생했다.

운동을 무리하게 해도 생각보다 덜 지치는데, 유독 사람만 만나고 나면 지친다. 고작 30분 만에 체력이 바닥난다. 사람에게 에너지를 빼앗기는 기질 때문이다. 그래서 누굴 만나고 나면 다음 날 쉬면서 바닥난 배터리를 충전해줘야 한다. 나는 사람을 만나고 난 후에는 배터리 충전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배터리를 여유 있게 충전하기 위해 약속은 금요일에 잡는다. 그리고 토요일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으며 배터리를 충전한다.




내향인은 사람을 만나고 난 후에는 반드시 충전해야 한다. 외향인은 사람을 만나서 몸속에 있는 배터리를 충전시키지만, 내향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충전시킨다. 외향인은 혼자 있으면 배터리가 소모되지만, 내향인은 사람을 만나면 소모된다. 그래서 외향인은 누군가를 계속 만나려고 하지만, 내향인은 가능한 한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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