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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Jun 18. 2021

여름비가 내리면, 쫄면!

비와 잘 어울리는 여름의 음식

 

 비를 몰고 다니는 여자. 그것이 나의 별명 중 하나였다. 나의 이름에는 비 우(雨)라는 한자가 들어간다. 그래서일까, 왜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비가 좋았고 내가 여행을 떠나면 자주 비가 내렸다. 요즘 ‘날씨 요정’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즐겨 쓴다. 함께 나들이를 떠났을 때 햇빛이 쨍- 한 날씨를 불러오는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다. 그렇다면 나는 ‘비의 요정’일까? 아무도 ‘비의 요정’이라고는 불러주지 않는 사태를 아주 가끔은 애석하게 느낀다. 비가 사람들이 늘 환영하는 대상은 아니기에 그런 탓이다. - 물론 내가 요정 같지 않은 탓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하 - 


 그래도 여행 가서 카페에서 멍하니 비 오는 걸 지켜보는 반나절도 꽤나 즐겁고 안온한 시간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그 계절이 여름이라면 더더욱.


 사계절의 비 중에서 특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의 여름의 비다. 여름 비는 단비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것들을 식혀준다. 온종일 뜨거운 해를 받느라 타 죽을듯한 동식물들을 적신다. 나는 야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도 아니거니와, 심지어 해를 피할 지붕과 최신식 샷시도 갖춘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름 비가 내리면 몸이 시원해짐을 느낀다. 그 축축한 쿨링 다운의 느낌이 참 좋다. 온몸으로 그 축축 촉촉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이 다 씻겨 내려가는듯한 흥분이 느껴진다. 비가 한바탕 내리고 나면 몸 한구석이 어딘가 청량해지고 청결해진다.


 여름의 베란다나 테라스도 사랑한다. 천성적으로 몸이 차가운 편인 나는 다른 계절에 비가 오는 풍경을 마음껏 즐기기가 힘들다. 금방 발이 차가워지거나 오한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름에는 약간의 후덥지근함과 함께 마음껏 여름비를 만끽할 수 있다. 베란다 창문 바로 앞, 혹은 어딘가의 테라스에서 바깥공기와 비를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이 즐겁다. 탁- 톡- 툭- 비가 내리는 소리를 음악 삼아 들어 본다. 눈으로 빗방울이 땅에 부딪히는 걸 지켜보고, 이따금 팔을 뻗어서 그 시원한 촉감을 느끼며 행복해한다. 우산이 없는 날에는 듬뿍 비를 맞아버려도 좋다. 비에 흠뻑 온몸이 다 젖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 첫사랑을 불러온 기분 같은 아련한 마음에 추억이 서린다. 그런다고 바로 감기에 걸리지 않을 따뜻한 여름의 날씨는 정말 감격적이다. 




                                       



 비가 오는 여름에는 또, 쫄면을 먹는다. 


시원하지만 냉면처럼 이가 시릴 듯 차갑지는 않고, 더위나 습도로 인해 집 나간 입맛을 불러오기에도 아주 제격이다. 겨울비를 맞이하는 김치전처럼 불 앞에 오래 서 있을 일도 없다. 냉장고의 자투리 채소를 처리하기에도 딱이다. 나에게 최고의 여름 음식 중 하나는 바로, 쫄면이다.



                                       



 쫄면. 도대체 왜 이다지도 귀여운 네이밍이 붙은 것일까. 쫄려서 쫄면인가. 쫄깃해서 쫄면인가. 국수 중 보편적으로 제일 인기가 덜한 막내 쫄병이어서 쫄면인가.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쫄면이 삶아지는 즐거운 시간을 기꺼이 기다린다. 약 3분가량의 신비한 시간. 쫄면은 냄비에 잘 붙기 때문에 옆에 서서 젓가락으로 한 번씩 저어 주는 게 포인트다. 끓어오르면 중간에 차가운 물도 한 번 부어줘야 한다. 그 쫄깃함을 탐닉하기 위해 들이는 이 시간이 나는 달콤하다. 곧 맛볼 생각에 기대감이 차오르고, 혀는 요들송을 부르기 시작한다. 



 쫄면의 네이버상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쫄깃한 국수에 야채와 고추장 양념을 비벼서 먹는 음식.> 그렇다. 쫄면은 비비는 맛이 있다. 갖은 재료들을 사사삭 풀어헤쳐서 젓가락으로 비벼낼 때의 뿌듯한 감정이 있다. 원래 노르스름했던 면을 발갛게 물들일 때는 물감을 풀어 염색을 하는 듯한 기분도 느낀다. 나는 원래 천성이 요리도 먹는 행위도 다 놀이 같이 느낀다. 야채들은 여름에 더욱 저렴하고 싱싱하기에 고명으로 얹으면 좋다. 양념장과 함께 비벼주면 심심한 야채들도 모두 저마다의 식감을 내고 맛있어진다. 고추장은 또 어떠한가. 나는 겨울이면 고추장을 만들어서 베란다에 숙성시켜놓고는 하는데, 여름이 되기 전 그 아이들을 다 통에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그럴 때 통이 모자라면 재빨리 고추장을 소비해야 하는데 고추장- 하면 나에게는 일 번은 떡볶이요, 그다음은 쫄면이다. 고추장을 빼놓고 쫄면을 맛있게 만들 방법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소면이나 라면은 간장 양념과도 잘 어울리지만 쫄면은 그 쫄깃한 면이 살짝 매콤하고도 또 새콤한 맛을 만나야 감칠맛이 살아나서 왈츠를 춘다. 고추장이 라면과 만나면 무도회장에서 서투른 파트너가 발을 한 번씩 툭툭 밟는 듯 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엉거주춤하고 어색한 맛. 그런데 고추장 양념장과 쫄면이 만나면 스르르륵 감겨들어서 턴을 도는 부드러운 춤의 맛이 난다. 나는 파트너의 정수리 꼭지에 손만 댔을 뿐인데도 파트너가 빙그르르 잘 돌아서 사람들은 탄성의 박수를 보낸다. 쫄면은 그런 무도회장의 상상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꼭 최근 드라마 '브리저튼'을 봐서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만큼 완벽한 맛이란 소리다. 고추장, 식초, 꿀, 매실청 등을 골고루 넣어 양념장을 만들어내면 매콤하고 새콤하고 달콤하고 다 하는 맛이 완성된다. 양념이 다양한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하늘 위의 누군가에게 감사하게 되는 그런 맛. 



 쫄면은 면을 너무 좋아하고 자주 먹는 내가 가장 죄책감을 덜 가지는 면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에 곤약면이나 두부면 같은 말도 안 되게 낮은 칼로리의 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맛있는 면은 아니니 논외로 치기로 한다. 감히 나 좀 맛있는 면 종류네- 할 수 있는 면 중에서는 이 녀석이 체감상 제일 건강한 느낌이 든다. 실제의 칼로리와는 무관하게, 나의 기분이 그렇다. 왜냐하면 야채 고명을 듬뿍 올려먹는 맛이 제일 잘 어울리는 면이기 때문이다. 오이도 양배추도 당근도 양파도 다 좋지만, 쫄면의 야채 고명중 으뜸은 수북한 콩나물이다. 



 이걸 쓰다가 사실 오타가 났었는데 수박한 콩나물, 이라고 썼었다. 수박만큼 콩나물을 많이 올려먹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에 과연 고쳐 써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둘 다 나쁘지 않은 표현이니까 살려보기로 결심한다. 콩나물을 수북이 얹든, 수박만큼 얹든, 어쨌든 쫄면에는 아삭한 콩나물 사이드가 필요하다. 맛있는 음식은 대체로 볼이 터질 듯 빵빵하게 입어 넣어주어야 단전에서부터 만족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하는데, 쫄면은 입안 가득 면으로만 채우면 사실 잘 안 넘어간다. 면 중에서는 좀 굵기가 있는 편이고 여러 번 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콩나물 한 움큼과 면을 함께 젓가락에 돌돌 말아서 입에 쏙 넣어주면 최고다. 양 볼 가득 콩나물의 아삭함과 면발의 탱탱함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다음 한 입을 말고 있다. 그렇게 몇 번 먹으면 금방 한 그릇이 싹 비워진다. 쫄면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한다면, 다 못 먹을 것 같은 양을 만들고도 늘 너무 금세 없어져 버린다는 점이다. 먹고서 맛있어서 눈을 감고 몸을 흐느적거릴 때,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가 한 젓가락 뺏어 가기라도 하는 것일까. 우리 집에 먹귀신이 사나요? 늘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여름비가 오면, 마음에 쫄면이 쪼록쪼록 흐른다. 

 아, 오늘도 비가 오네. 맥주도 한 잔 곁들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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