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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Jul 08. 2020

하버드대 교수가 사임 후 지적장애아 시설에 들어간 이유


“한 개인이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는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선택하기로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을 정해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내에 관해 생각을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손을 한 번만 더 잡아보고 싶었습니다. 단 한 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한 번만 더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것이 내 생명을 일 초 일 초 연장해주었습니다.”  

─  빅터 프랭클,《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이다. 열악한 음식과 환경, 제대로 된 의료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수많은 동료가 죽어 나갔지만,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후 “어떻게 해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라는 질문을 받은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는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의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그가 3년 동안 머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오로지 죽음과 절망만이 가득했다.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생사가 엇갈리는 그런 끔찍한 환경에서도 삶의 의미와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절대 잃지 않았다. 

그와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매일 면도를 거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배급되는 음식이라고는 하루에 수프 한 그릇과 완두콩 한 알이 전부였을 만큼 수용소 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불행에 절망하기보다는 하나의 목표를 정해서 거기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것이 최악의 환경에서 그들을 살아남게 한 힘이었다.  



◆ 인생은 내리막길에서 훨씬 성숙해진다


오체투지. 바닥에 엎드려서 절할 때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는 데서 이름 붙여진 티베트인들의 수행법이다. 그만큼 고통스럽다.  


티베트인들은 누구나 평생 한 번은 자신을 내려놓는 오체투지 고행을 떠난다. 자만과 오만을 떨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회하며, 참된 자신을 찾기 위해서이다. 심지어 한쪽 다리를 잃고도 그런 고행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겹겹이 꿰매 다 떨어진 누더기를 바닥에 깔고, 땀과 때에 절어 새까매진 얼굴로 끊임없이 오체투지 하는 그들을 보면 존경심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면서 삶의 진실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자, 자만과 오만에 빠져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 자신에 관한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제네시 일기》 등 20여 권의 책을 출간한 헨리 나우웬(Henri J.M. Nouwen) 박사는 1986년 교수직을 돌연 사임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지적 장애아들을 돌보는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누군가가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사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오르막길만 걸어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일등으로 달려서 하버드대학 교수까지 올라갔지요. 그러나 나이 들면서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은 내리막길에서 훨씬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낸 헨리 나우웬 박사는 교수직을 돌연 사임한 후 지적 장애아를 돌보는 공동체에 들어갔다.



높은 곳에 서야만 내가 보이는 게 아니다. 가장 절박하고 힘들 때, 즉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 비로소 나와 마주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보는 나는 오만하고 자만할 수 있지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나는 더는 잃을 것이 없기에 더없이 겸손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만과 자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만, 겸손과 진실함은 자신을 바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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