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화폐
화폐와 시장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통’ 경제학은 이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에서 비롯된 것처럼 설명하며, 바람직하다는 전제 위에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들은 화폐와 시장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법칙, 즉 자연법에 근거한 객관적인 실재로 간주합니다.
사실 많은 근대 철학자가 자연법을 근거로 다양한 현 체제를 정당화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국가가 자연법에 기초한다고 믿습니다. 국가는 사회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고, 범죄를 억제하며, 게으른 자가 남의 것을 빼앗지 못하게 막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가는 살아남기 위해 폭력이나 무력, 강압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가 결코 ‘자연스러운’ 자연법에 따라 유지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경제학자들 역시 사회 제도를 인위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으로 구분합니다. 예컨대 봉건주의는 인위적이고,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제도로 간주합니다.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 맞으며, 부(富) 역시 자연법칙에 따라 생산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자신 종교만이 신의 계시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발명해 낸 것이라고 믿는 신학자“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형성된 제도이지, 결코 자연법칙의 산물이 아닙니다.
자연법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법은 자연법에 근거해야 정당성을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법이 자연법에 어긋나면 법의 기능을 상실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따르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도덕 기준이 자연법이라면, 인간의 법도 그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약해지자, 개신교 법률가와 신학자들은 자연법사상을 적극 받아들였습니다. 국가와 통치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우려가 커지자, 신민들이 지켜야 할 ‘의무’를 정당화할 새로운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은 복종이 더 이상 교회 권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법은 국가나 통치자, 화폐, 시장 등 어떤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고, 이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하다고 낙인찍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현상을 사실이자 객관적이고 진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인 셈입니다. 자연법 논증은 대개 ‘인간 본성상 어떤 상태가 자연스럽고, 이를 벗어나면 잘못’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곧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움은 단지 사실일 뿐, 당위(當爲)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처음 지적한 사람이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76)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존재와 당위의 간극’(is-ought gap)이라 불렀습니다.
흄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존재(=사실)에서 당위(=가치)를 이끌어내려면, 반드시 또 다른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그 계획은 국민총생산을 5퍼센트 늘릴 것이다”라는 ‘사실’에서 “따라서 그 계획은 승인되어야 한다”는 ‘당위’로 나아가려면, “국민총생산을 늘리는 건 바람직하다”라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는 가치 명제가 추가로 필요합니다. 모든 당위 판단은 중립적인 사실만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절대자 신이 있으니 믿어야 한다”는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걸 믿어야 한다는 당위가 서로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려면, “절대자는 믿지 않는 자를 지옥 불에 보낸다”거나 “절대자를 믿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같은 별도의 가치 판단이 필요합니다.
‘동물도 암컷이 새끼를 돌보니, 인간도 어미가 자식을 돌보는 게 당연하다’거나,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 방식의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에서 인간 사회 질서의 원형을 끌어오려는 시도지만, 이는 흄이 지적한 ‘존재와 당위의 간극’을 무시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이기적인 생존 투쟁을 겪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해 인간관계도 본질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면, 이는 ‘존재’에서 ‘당위’로 부당하게 도약한 사례입니다. 그럼에도 자연을 적자생존의 싸움터로 보고, 사회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나 경영학자가 여전히 많습니다. 그들은 인간 본성을 계산적이고 경제적인 이윤을 좇는 ‘이기주의’로 단정합니다. 이런 생각이 제도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 심성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경제 시스템이 자연법칙을 따른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는 체념 속에서 살게 됩니다.
‘정통’ 경제학이 전제하는 ‘이기적인 인간’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흄은 이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미덕이나 우정에서 느끼는 은밀한 기쁨 때문에, 선한 행동의 동기가 결국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이기심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기쁨은 선한 감정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내가 친구에게 잘하는 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로 인해 얻는 기쁨이라는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도덕성을 ‘이기심’으로 환원하는 시선은, 인간에 대한 편향된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진화생물학자 조지프 헨릭(1968~ ) 연구팀은 2000년, 다섯 대륙 12개국 15개 공동체를 직접 방문해 농부나 유목민, 수렵채집인을 조사했습니다. 경제학이 가정한 ‘이기적인 인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조사 결과는 늘 한결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매우 점잖고, 친절했습니다.
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건 정치적인 격언일 뿐이다. 물론 어떤 격언이 실제로는 거짓이지만, 정치적으로 참이어야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다.” 시민을 강력히 통제하려는 체제와 권력 입장에서는 인간의 선한 면을 강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법 없이도 잘 사는 사회에는 법과 권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전제는 결국 특정 권력 질서에 유리한 생각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념을 ‘이데올로기’라 불렀습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마르크스가 근대 자연법사상을 비판하며 주목받았습니다. 그는 역사에 따라 변하는 사실을 고정불변한 자연법칙처럼 여기는 태도를 문제 삼았습니다. 모든 사실(事實)은 결국 사실(史實)의 산물입니다. 이후 변하는 걸 고정된 것으로, 인위적인 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모든 생각이 이데올로기로 비판받았습니다.
자연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나 ‘삶의 의미’에 답을 줄 수 없습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는 종교나 철학,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심지어 불가피해 보여도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입니다. 당위와 사실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합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과 ‘그래야 하는 것’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과학이 아무리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들, 우리가 판단하는 도덕과 의미에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과학은 탐구 방법이지, 세계관이 아닙니다. ‘과학적인 세계관’은 없습니다. 도덕과 의미는 자연이 아니라 우리 윤리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스러운’ 윤리나 규범, 권리, 의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매우 다양하며, 무엇이 인간적이고 그렇지 않은지는 인간 본성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자연법은 흔히 자연에 기반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규범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인위적입니다. 자연법조차 그렇다면, 화폐와 시장을 다루는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이 과연 객관적인 ‘과학’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