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연애와 결혼까지, 그리고 아이까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고아가 되었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남자의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는 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의 어머니는 흔쾌히 응해주셨다.
사람들이 고아가 된 나를 가엽게 여겼지만, 그저 시선만 안쓰럽게 보낼 뿐, 순수하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주려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확실하게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는 외롭기도 했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이 괜히 싫어졌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괜히 미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사람을 만난 건 내 최대의 행운이자 행복이며, 그 사람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의 결혼이 순탄치 않았던 이유는, 우리의 결혼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부부로서 같이 가정을 꾸리면서, 우리 아이에게는 '우리와는 달리 평범하고 화목한 과정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우리를 망설이게 했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앓았다는 것은,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를 알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더 걱정스럽고 두렵기도 하다.
상처는 나 혼자만 있던 게 아니었다.
남편은 가정폭력이 있던 집에서 자랐기에 늘 두려움이 많았다.
그가 그의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받았던 폭력만큼, 후에 그런 게 나에게나 아이에게 이어지진 않을지 하는 걱정이었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이 품고 있던 상처는 낫지 않고 악영향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먼저 이겨내려고 몸소 실천하기 시작했다. 일종에 예방접종이라고 할까? 자신이 아버지에게 당했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고, 직장이든 어딜 가서든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믿음을 주는 행동이었다.
그건 우리 가정이 화목하게 이어주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이가 30개월이 되어가고, 우리는 별다른 걱정 없이 순수하게 가정을 꾸려나가며 가족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연인으로서 사랑하던 감정은 한 사람의, 아니 서로의 버팀목으로서 사랑으로 번졌다. 결코 그를 남자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불만은 있었다.
그는 나와의 기념일만 되면 사라졌다. 나의 생일이나, 나와의 결혼기념일이나, 최근에는 명절에도 혼자 어딘가에 다녀오곤 했다. 어떨 때는 정말 너무 늦게 귀가를 했다.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은 건가 할 정도로. 그래서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호텔에 분위기를 잡아 볼까 했지만, 남편은 영 시원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어? 아 응."
이런 식으로.
그 한 순간에 그다지 나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확신이 들었다.
평소에는 그런 기색은 없는데, 기념일만 되면 그런 반응이 나온다.
"사람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도 있는 건가"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기념일은 특별한 게 없다. 그저 그 날의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자 하는 우리들끼리만의 의식 같은 일이니까. 그저 그때의 일을 추억하고 다시, 계속 사랑하고자 같고 싶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는 나와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의심은 들었다.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닐지.
그리고 그 기념일은 명절이 되어서도 똑같이 이어졌다.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닐까 했지만, 명절까지 그런다는 건 좀 이상했다. 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여보, 대체 왜 그래? 왜 이런 날만 되면 어딜 가는 거야?"
"응? 아니, 어딜가긴 어딜 가?"
"왜, 대체 나한테 뭘 감추려고 하는 거야?"
"감추긴 뭘 감춘다고 그래. 그런 거 없어."
"자기가 이러는 거, 나 정말 미치게 만드는 거야."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내가 친어머니라고 여기는 시어머니도 역시 남편의 편만 들고 나를 진정시키려고만 했다. 아들이 무엇을 하든 용서를 할 것 마냥,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너무 외롭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아마, 그런 시기를 기준으로 나는 우울증을 심하게 겪기 시작했다.
임신하고 있을 때도 그 사람은 내가 우울증이 걸린 줄도 모르게 잘 다독여 주었지만, 확실히 우울증이 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고했다.
"사실, 장모님 장인어른 뵙고 왔어."
그 말에 나는 내 머리에 벼락이 그대로 꽂힌 것처럼 머릿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한마디로 인한 순간의 정적은 폭풍전야가 아닌, 그냥 폭풍이었다.
내가 고아가 된 이유는 부모님이 사망하셨던 게 아니다. 부모님이 나도 모르게 사라졌고, 그렇게 나는 버려졌었다. 그리고 남편은 기념일만 되고 명절이 되면, 나에게 오기 이전에 나의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왔던 것이었다.
"자기가, 대체 왜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
나는 난생처음으로 크게 소리쳤다. 그 사람이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큰소리에 약하고 폭력에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때리는 것 같은 큰 고함을 내질렀다.
"당신이... 왜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냐고..."
남편이 미워질 만큼 속상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는 물론, 내가 성인이 되어가면서도 돈을 벌어 오신 경우가 드물었다. 벌어 오신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여흥을 위해서 돈을 쓸 뿐, 우리 가족의 생활비는 어머니와 나의 아르바이트 비로 충당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할 때만 주먹으로 불러들였고, 어머니와 나는 그 외엔 외면하느라 눈치만 계속 늘어났었다.
아버지에게 반항을 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커 가면서 힘으로 대응을 하면, 나에게 풀지 못한 응어리를 어머니에게 풀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앞에서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떨 때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서 식당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학교를 다닐 때도 급식을 공짜로 먹을 수 있도록 학교의 급식일을 도왔다. 하루 일당이 필요해서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저녁에 술집에서 서빙을 하면서 일을 하기도 했다. 집을 돌아가는 길에 나의 손을 보면 칼로 베인 상처나 벽돌을 옮기면서 긁힌 여러 상처, 또는 습진, 손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게 번 돈마저도 아버지가 가져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게도 비밀로 하며 나의 개인 자금을 따로 모았다. 그건 나의 미래를 위한 돈이었다.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고 싶었다. 내 궁극적인 꿈은 그저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 그녀는 아버지와 마주 할 일은 없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가버리신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숫자를 세기에도 무안할 정도로 장례식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와 나의 주변에는 사람이 달아나기 일수였고, 그중에 그녀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찾아왔었다.
"뭐 하러, 여길 와."
나는 그렇게 살짝 어눌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녀가 아버지의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본다는 게 싫었다.
"당연히 와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화를 내야 할지, 긍정을 해야 할지, 솔직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아버지이지만, 나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겠다고 온 그녀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했다.
모아둔 돈은 적었지만, 그녀도 나도 초대할 관객도 많지 않았고 소소하게 식을 올리고 소소한 신혼집을 만족하며 아이 하나로 평범하게 그지없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로 약속했다.
처음에 우리 두 사람의 아기를 만났을 때에는, 그 아기를 안으려고 내민 나의 손에 상처가 먼저 보였다. 그게 신경 쓰여 내밀던 두 팔은 안으로 굽어지는 손가락처럼 빈 채로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왜 그래? 안 안아 볼 거야? 울까 봐 그래?"
"아니... 내 손이... 너무 엉망진창이라서, 애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역시 두려움이 있었다.
아무리 내가 폭력을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폭력의 아래에서 보고 맞고 자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작은 아기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분명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내가 아버지가 되어도 괜찮을까 하는 자격을 운운했다.
"안아 줘.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빨리."
그녀는 나를 재촉했다.
얼떨결에 아기를 앉자마자, 불편했는지 역시 울음을 바로 터뜨렸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고 괜히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 내 모습이 웃겼던 건지, 그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뭔가가, 시작되는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아기를 낳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생명의 위기나 그런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히 회복이 더뎠다. 원래부터 영양섭취가 원활하게 하지 않을뿐더러, 체질 자체도 영양분을 잘 흡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염려했던 부분에서 건강의 문제가 드러났다. 아내는 하루 종일 병실에서 회복이 되기를 기다려야 했고, 회복세는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내의 아버지라고 칭하시는 분이 나의 앞에 나타났다.
아내가 어릴 적에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부모님은 사라졌었고, 자신을 키워 준 사람은 세상을 떠난 할머니와 할아버지라고 했다.
부모와 아내의 사이에서 어떤 착오가 있더라도, 정말 착오라고 하더라면 다시 데려오지 않았던 아내의 부모님을 편을 들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아내는 혼자 자라왔고, 혼자 나에 곁에 다가왔다.
아내의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애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딸아이가 결혼했다는 연락을 받긴 했는데, 도통 찾아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만나러 왔습니다."
나에게 존칭을 하면서 말씀하시는 게, 영 어색했다.
그분은 아내가 아닌 나를 만나러 왔다. 아내가 아파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서.
"그냥, 만나 보시는 건 어떠세요?"
"아무래도 안 좋아 보이는 건강상태에, 저를 보면 분명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르죠. 그냥 이것만 건네주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아버지는 고개,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내고 허리를 피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더 이상, 딸아이의 소식을 뒤로 듣지 않겠습니다. 찾아오지도 않겠습니다. 이런 처지에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염치 불고하고 하겠습니다. 딸아이를 부탁합니다."
나는 아내의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내도 그다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신경은 분명 쓰였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싫어하는 건 '나의 아버지'다. 나 또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 또한 아버지가 되는 게 처음이니까. 나의 아버지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아내의 아버지는 분명 큰 잘못을 했기에, 무엇을 하면 안 되고 무엇을 하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변명으로 아내의 아버지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사실 그저 그분의 쓸쓸한 뒷모습을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나의 남편은 아버지와의 만남을 고백했다. 내가 아기를 낳고 회복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그 이후로 이따 금식 남편은 나의 아버지를 찾아뵈었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했다. 나는 그 시간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심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오히려 불안함이 더 컸다.
그 사람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불안한 게 아니라,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다는 게 불안했다. 아버지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안 그래도 아버지로 인해 상처가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식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뭘 어쩌려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보, 사실 아버님이 돌아가셨었어."
그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아 뭔가 얼버무리려 하는 것처럼,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이 더듬었다.
싫어하는, 미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뿐인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사람이 정말로 볼 수 없게 되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눈물을 쏟고 있었다.
남편은 2년 전부터, 혼자서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내가 결혼 한 날, 나의 생일, 함께 해야 할 명절에 먼저 다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의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최근에 더 그 자리에서 일찍 뜰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따로 하지 않고 화장까지 하여 따로 모시고 있었다. 그전에 돌아가셨다는 어머니도 함께.
그건 아버지가 남편에게 따로 쓴 유서 때문에 행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왜 그리 자신을 찾아올 수 있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저는 제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많으니까요. 제 아내의 기억 속에, 아버님이 그렇게 자리잡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한테 뭘 바라는 건가. 그리고 이미 큰 죄를 저버린 사람인데."
"그저, 딸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생각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나를 만나러 오시지 않았다.
그러시지 못한 건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시지 못한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남편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했다.
"그저, 지금처럼 딸에게 알리지 말아주게, 자네가 이렇게 와 주는 것 만해도 미안하고 고마워. 내가 그 아이의 손주의 소식까지 들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마운 건 맞아."
"그럼 한 번 용기를 내셔야죠."
"분명, 그때 혼자서 많이 울었을 텐데, 또 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죽어도 못해, 이미 꿈속에서 딸애가 나를 찾아 우는 소리가 얼마나 들었었는데."
"그러니까 만나야죠."
"그저, 숨길 수 없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아버지는 자신의 용기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를 기다렸던 걸까. 그런 약속을 했다고 했다. 남편은 그 약속이 이행되기를 기다렸지만,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내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 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싫었는데도, 결국엔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전혀 찾지 않는 건 아니더라. 분명 밉긴 한데, 그리워한다기보다는, 그래도 전혀 나빴던 기억만 있던 게 아니니까, 정말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도 있었으니까. 그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했겠지. 그건 너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었어."
딸이 필요했던 아버지는 남편의 모습에서 나를 찾았고, 아버지가 필요했던 남편은 다정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의 아버지에게 찾았었다.
아버지는 두 개의 유서를 남겼었다.
하나는 남편에게, 하나는 나에게.
그리고 나에게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는 유서와 함께, 나에게 돌아오셨다.
"그래도 유서를 남기셨다는 건, 아무리 그런 말씀을 하셔도 결국엔 너를 정말 보고 싶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편의 그 말에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날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나는 유서 봉투를 가슴속에 품고 억누르던 벅차오르는 감정을 풀어냈다.
"너는 분명 아버님이 앞에 다시 나타나면, 그때 왜 그랬냐고, 떼쓰는 아이처럼 울기만 했을 거야. 분명 언젠가 나타나면 용서해주려고 했을 거야. 그만큼 보고 싶어 했으니까."
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남편은 내가 펑펑 울 수 있게, 편하게 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남편의 말이 맞았다.
분명 부모님을 미워해도, 그 미움은 사랑했던 기억이 있기에 그에 반한 감정이었다. 미운만큼 사랑했던 마음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온 게 너무 속상하고 괴로웠다.
사실, 너무 보고 싶었고 원망하더라도 또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
그건 어렸을 적에 행복한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엄마 아빠를 좋아했으니까. 사랑했으니까. 사실은 정말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남편은 변했다.
아픔이 있었기에 내가 있어줘야 하는 그럼 사람이었는데, 아니 어쩌면 그건 내 생각뿐이었던 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이미 그 사람은 든든한 등을 가진, 우리 가족이 기댈 수 있는 그런 기둥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어느새 그 등에 기대고 있었다.
아이는 나보고 울지 말라고 되려 울고 있었고, 남편은 그저 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날은 분명, 중학생 때부터 내가 숨겨두고 쌓아두었던 눈물들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사연을 글로 풀어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