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사이든 가족이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행복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괴로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 괴로움은 '헤어짐'으로 많은 고통을 낳기도 한다.
예전에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 주인공의 어머니를 보면서 사랑하는 아들로 인해 더 큰 고통이 따르는 걸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극장의 사람들은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신파'라는 것으로 좀 억지스럽게, 너무 의도적으로 그런 입장을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슬퍼하고 왜 괴로운지 왜 눈물을 흘리는지 공감하고 몰입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이 눈물을 흘렸지 않았을까.
그 괴로운 심정을 바라보면서 나도 정말 마음이 아파졌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고 하는데,
이따금씩 그 선을 넘어서
괴롭게 만드는 사랑은.
정말 행복의 가치가 있는 걸까.
라면서.
흔히 비유하는 '양날의 검'처럼 자신 또한 아프게 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면, 행복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하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남자가 청진기로 다른 한 남자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나를 그 영상을 끝까지 보게 만들었다.
어느 딸을 가진 아버지, 빌 코너의 이야기였다.
딸은 친구들과 멕시코로 여행을 갔다. 여러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그 틈 사이에 딸도 바닷속으로 풍덩, 물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즐겁게 노는 그 사람들 틈에서 딸은 물에 잠겨서 목숨이 위험해졌고, 구출은 되었지만, 뇌에 큰 손상을 입었다.
바로 수송은 되었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딸은 사망했다.
그 딸의 나이, 고작 20살이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는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평소에 죽어서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딸의 말을 기억하고, 아버지는 4명의 환자에게 장기들을 기증하며 소중한 생명을 이어나가게 해 주었다.
하지만 딸의 의지를 이어나가게 하더라도, 아버지로서 딸을 잃은 슬픔은 가시지 않고 눈 앞에 아른거리는 딸의 모습에 눈물만 흘렸다.
하루하루, 매일 딸을 보고 싶어 했다.
"딸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 아버지는 그런 의지로 무작정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딸의 장기를 이식받았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연락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았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네 명 중 먼저 연락을 취한 세명과는 달리 마지막 한 사람은 아버지와 만나기를 원했고, 아버지는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을 다시 자전거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 자전거의 딸의 사진을 붙이고서.
그가 마지막 장기이식자를 찾아가는 데 자전거로 달린 거리가 총 4000km였다.
사람은 늘 동화 속이나 영화 속의 사랑을 꿈꾸곤 한다.
환상적이고 희망적이고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결말을 이어 내기 이전에 큰 고통이 따라왔다. 그건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이었다.
위의 이야기처럼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닌 괴롭고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때문에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사랑은 정말 행복의 가치가 있는 게 맞을까 하는 순간이 들기도 한다.
4000km.
솔직히 얼마나 먼 거리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약 400km라고 하는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가 멀어 KTX로 3시간이 안 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고 지칠 때가 있었는데, 그 10배는 얼마나 오래 걸릴까.
정말 사람이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일까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정말, 고통스럽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자전거를 계속 밟았다고 한다.
고통스러웠겠지만, 희망을 품으며 페달을 밟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달린 아버지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를 맞이 하면서 하나의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건 청진기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딸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세요."
4000km의 페달을 밟는 고통에서 행복과 감동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영화 속의 사랑은 물론 현실 속에 사랑은 여전히 쉽지 않다.
영화에서 나오는 사랑이야기도 슬프고 비애에 가득 찬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 감동을 받기 때문에 로맨틱하다고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환상적이다."
그 말 그대로였다.
위의 이야기,
빌 코너의 이야기는 비록 기증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감동을 받았지만, 여전히 딸을 잃은 것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감동으로 인해서 슬픔에서 더 강해지고 딸을 그리며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랑 때문에 행복했고, 그렇기에 슬퍼하고 괴로울 수도 있지만, 또다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반대로 괴로울 수도 있기에,
행복의 가치를 물었지만,
어쩌면 사랑은 앞 뒤가 다른 동전의 그림들처럼,
행복하기에 슬퍼할 수 도 있고,
슬프기에 행복을 찾고 바랄 수도 있고,
행복과 슬픔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품는 게 아닐까.
비록 사랑에 행복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랑의 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고 고민하며,
행복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며 그런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 건,
꽤나 인간적인 게 아닐까.
사랑은 누구에게나 필수라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저 좀 더 삶에 더 폭넓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인끼리든, 가족끼리든,
소중한 사람에게서 어떤 형태의 사랑은 가지고 있는 만큼, 주고받는 감정은 다양할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글의 '사랑의 가치의 의문'은
지금 메거진을 쓰고 있는 '사랑할 때와 사랑하고 싶을 때'에 알맞은 주제가 아닐지 생각해 봤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런 마음을 바라고 싶을 때.
[사랑할 때와 사랑하고플 때.]
이 메거진은,
그런 이야기를 하나하나 써 가며,
사랑을 하면서 독자분들의 처한 어려운 상황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사례나 사연처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쓰는 글이 자신에 처한 상황에서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라 생각하고 클릭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누구든지 각자의 특이한 상황은 있을 것이고 그것도 모르면서 알맞은 해답을 드릴 수 없기에, 제가 알려드리는 방법이 맞다는 둥, 함부로 독자분들을 가르치는 글을 쓰고 싶지 않기에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참고 삼아서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죠.
그로 인해 많은 구독자 분들을 얻었고, 계속 글을 쓰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분명 공감되지도 않는 이야기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이야기인 만큼,
가볍게라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글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