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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11. 2017

03.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을수록

<당신의 완벽한 1년>

요나단

1월 1일 월요일8시 18

요나단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한 소리 같지만 누군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알스터 호수 주변에는 아직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고 차 한두 대만 도로를 천천히 다니고 있었다.

요나단이 다시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려는 찰나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누군가 있다! 아래쪽 강변 ‘알스터페를레’ 뒤에 반쯤 몸을 가린 그림자 형상이 보였다. 요나단은 다이어리와 가방을 꽉 움켜쥐고 무작정 달려갔다.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물가에 서서 거울같이 반드러운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요나단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없이 계속 알스터 호수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이봐요!”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요나단은 발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다가가 크고 늘씬한 남자 앞에 섰다.

청바지에 운동화, 흰색과 빨간색 줄무늬 티셔츠만 입은 남자의 모습은 영하의 날씨에 호숫가를 산책하기에 결코 적합한 차림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요나단은 다시 인사를 건네며 남자의 어깨를 조심스레 건드렸다.

그제야 움찔하며 뒤돌아본 젊은 남자는 짐작건대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금테 안경 덕분에 초록색 눈이 더욱 커 보였다. “저요?”

“네.” 요나단은 여전히 숨을 헐떡였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이거 그쪽 겁니까?” 요나단은 낯선 남자에게 다이어리와 가방을 들이밀었다. 그러는 자신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 사람이 뭐라고 생각할까? 조깅하던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다짜고짜 물건을 들이미는 모습은 분명 이상해 보일 것이다.

낯선 남자는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갈수록 격렬하게. “아니요. 제 물건이 아닙니다.”

“아, 그렇군요.” 요나단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왠지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게 제 자전거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 가방이 제 자전거 손잡이에 걸려 있었는데, 가방 안에 이 다이어리가 있었어요.” 요나단은 마치 증거라도 제출하듯 다시 한 번 다이어리를 가리켰다. “주위에 그쪽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혹시 이 가방 주인이신가 해서…….”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제가 그쪽 자전거 손잡이에 가방을 매달아 놓았는지 물어보시는 거죠?” 젊은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남자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저는 그쪽 자전거에 물건을 매단 적이 없습니다.” 그의 엷은 미소는 어느새 환한 미소로 번졌다.

불현듯 해리 포터가 떠올랐다. 금속테 안경과 살짝 헝클어진 갈색머리에 동안인 남자를 보니 저절로 해리 포터가 생각났다.

순간 요나단의 머릿속에 그의 아버지 볼프강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치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 요양원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본인 인생의 가장 큰 굴욕에 대해 언급했다. 90년대 후반, 아버지는 모든 편집자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작은 마법학교 학생에 관한 독일어 판권을 거부했다. 볼프강 그리프는 수백만 부가 팔린 해리 포터의 대성공을 ‘서양문화의 몰락의 징표’,‘ 서양문학의 오점’이라며 폄하했다.

아버지는 지금도 가끔 맑은 정신이 돌아올 때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지금처럼 병든 상태에서도 그 천진난만한 아동서에 그처럼 흥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자신은 부디 그러지 않기를. 그것이 치매든 놓쳐버린 기회에 대한 후회든.

아버지가 뼈아픈 기억들을 떠올릴 때마다 요나단은 그리프손 출판사의 아동·청소년 분야는 해리 포터 없이도 아주 잘나간다는 말로 진정시켰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는 마르쿠스 보데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동·청소년 분야를 이미 3년 전에 완전히 정리했다. 보데는 아동·청소년 부문이 출판사의 브랜드를 모호하게 만들고 독자성을 훼손한다고 설명했다. 차라리 출판업자들과 재력있는 타깃그룹이 인정하는 핵심 분야인 고급 문학과 전공서적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보데는 ‘정말 중요한 핵심 분야’에 집중한 것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늘 강조했고 요나단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는 잘 돌아갔고 수익도 많았다. 신문 문화면이 가장 선호하는 출판사이기도 했다.

“괜찮으세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요나단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바람이 부는 알스터 호숫가에 서 있는 상당히 차가운 현실로.

“네? 네.” 요나단이급이 대답했다. “그저 누가 이가 방을 내 자전거에 걸어놨나 이상해서…….”

남자는 미소를 짓는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새해선물 아닐까요?”

“아, 네.” 요나단은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그는 젊은 남자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실례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남자는 인사말을 마치기도 전에 알스터 호수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말없이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요나단은 자전거 쪽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아쉽네요.”

소리가 너무 작아서 긴가민가한 요나단은 그는 뒤돌아보았다. 호숫가의 남자도 뒤돌아보았다.

“뭐라고 하셨어요?” 요나단이 물었다.

“아쉽지 않아요?” 해리 포터를 닮은 남자가 물었다.

“뭐가요?” 요나단은 낯선 남자를 향해 다시 몇 발짝 다가갔다.

남자는 고갯짓으로 호수를 가리켰다. “백조들이 다 사라진 것 말입니다.”

“백조들?”

“백조들은 뮐렌타이히에 있는 겨울나기 쉼터에서 머물다가 봄이 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애석한 일이죠.”

“음.” 요나단은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남자의 눈빛 때문에 마지 못 해 덧붙였다. “정말 아쉽네요.”

“저는 백조를 바라보는 것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러시군요.” 요나단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동물이죠.”

“영적인 동물이에요.” 겨우 알아들을 만큼 나지막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백조는 빛, 순결 그리고 완성을 나타내요. 초탈의 상징이죠.”

“아,”요나단이 아리송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굉장하네요.” 어떻게 그런 걸 아는지 물으려는 찰나 왜 젊은 남자가 이렇게 가벼운 옷차림으로 새해 첫날 아침부터 추위에 떨며 호숫가에 서 있는지 깨달았다.

마약이다!

이 사람은 아마 송년 파티를 거하게 하고 여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머무른 상태일 것이다. 요나단은 그가 동상에 걸리거나 어리석은 짓을 못하도록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인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집어치웠다. 남자는 멀쩡해 보였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조금 창백해 보이기는 했지만, 맛이 간 사람 같진 않았다.

“그럼 뮐렌타이히로 가보세요. 백조가 그렇게 보고 싶다면 말이죠. 여기서 멀지 않아요.” 요나단이 제안했다.

남자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그러더니 더는 아무 말 없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뮐렌타이히에 가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요나단은 잠시 멈추고 괴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리 포터를 닮은 남자가 무슨 약을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놀라운 효과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요나단은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겼다. 백조, 영적인 동물, 초탈……. 미쳤군!

산악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와서야 그의 손에 여전히 가방과 다이어리가 들려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어떻게 하지?

요나단은 다시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멀리 걸어가는 젊은 남자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벤치에 앉은 요나단은 다이어리의 부드러운 가죽 표지를 매만졌다. 잠시 망설인 그는 결국 똑딱단추를 열고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다.

당신의 완벽한 1년

첫 페이지에 만년필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다른 건 전혀 없었다. 보통 다이어리에 적어놓기 마련인 이름도 주소도 없었다.

몇 장을 넘기다가 이제 막 시작된 새해 1월 1일이 적힌 곳을 펼쳤다. 다이어리는 날짜당 한 페이지 분량이었고 모든 페이지에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에 적힌 것과 똑같은 예쁜 글씨체였다.

1월1일
우리는 인생의 날들을 늘릴 수는 없지만, 그날들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는 있다.
-중국 격언


요나단은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는 달력용 격언이군! 이보다 심한 것은 ‘카르페 디엠!’ 정도뿐일까. 아니면 너무 자주 인용되어 흔해 빠진 찰리 채플린의 명언 ‘웃음없는 하루는 낭비한 하루다.’ 선물 받은 머그컵에 적힌 끔찍한 금언들! 그런데도 호기심이 생긴 요나단은 오늘 하루를 위해 적힌 글을 끝까지 읽어갔다.


12시까지 푹 자기. 침대 위에서 H와 함께 아침 식사하기. 알스터 호숫가를 산책하고 알스터페를레에서 글뤼바인(계피와 레몬 등을 넣고 끓인 뜨거운 포도주-옮긴이) 마시기.
•오후에 할 일: DVD 연이어보기. 볼만한 영화:
-P.S. 아이러브유
-버킷리스트
-노트북
-양들의침묵
•대안: 남과 북 모든 시리즈
•저녁에 할 일: 방울토마토와 파마산 치즈를 곁들인 파스타& 와인먹기
•밤에 할 일: 꼭 껴안기, 별 보기, 소망 속삭이기

요나단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 선정이 뭐이래? <양들의 침묵>을 본 후에 ‘소망 속삭이기’를 어떻게 하려고? <남과 북> 모든 시리즈를 다 보려면 뭘 먹거나 껴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니까.

몇 년 전 티나가 매주 ‘남과 북’에 등장하는 어리와 매들린의 유치한 사랑 이야기를 보자고 조른 적이 있었다. 이 외화 시리즈는 전기톱 살인마 영화 열 편 만큼 보기 힘들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남의 일기장을 엿보는 것처럼 옳지 않은 행동인 것을 알지만 참기 힘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감탄이 샘솟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 년의 마지막 날까지 세세하게 기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12월 31일까지 모든 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비록 거의 모든 기록이 상투적인 명언들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무엇이든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생텍쥐페리)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8월 25일처럼 거창한 스케줄도 가끔 적혀 있었다.


캠핑카를 빌려 장크트 페터 오르딩으로 떠나기. 조개 줍기, 바비큐, 야외취침. 음악 잊으면 안 돼!

3월 16일처럼 소박한 스케줄도 있었다.


내 생일!
오후에 하인 거리 ‘뤼트카페’에 가서 속이 메슥거릴 때까지 케이크 먹기

6월 21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름 시작! 새벽 5시 엘베 강 변에서 일출 구경하기!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을수록 요나단은 왠지 슬퍼졌다.

이 다이어리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 하니까. H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지인조차 없다. 옆집 헤르타 파렌크로크 부인을 제외하면. 백번 양보해서 그 부인의 생일이 3월 16일이라고 해도 분명 90세가 넘었을 그녀는 강아지 다프네와 살고 있다. 그 노부인이 몇 주 동안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요나단을 위해 다이어리의 모든 페이지를 채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요나단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이유는 바로 글씨체였다.

다이어리의 글씨체가 어머니 소피아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한참 만에 깨달은 것이다. 요나단이 10살 때 아버지와 이혼하고 떠난 어머니였다.

요나단은 한동안 어머니를 잊고 살았다. 하지만 다이어리를 보고 있으니 옛날 어머니가 집안 곳곳에 남겼던 수많은 편지와 쪽지들이 기억나 가슴이 아팠다.


“잘 잤어, 우리 아들? 오늘 행복한 하루 보내!” 아침이면 스크램블에그와 햄이 담긴 접시 옆에 이렇게 적힌 쪽지가 있었다. 학교 쉬는 시간에 어머니가 간식으로 싸준 빵을 꺼낼 때마다 포장지에 “맛있게 먹어!♥”라고 적혀 있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 다음 시험은 잘 볼 거야!” 망친 수학시험공책에는 이런 쪽지가. “좋은 꿈 꾸렴.” 어머니는 매일 밤마다 이 쪽지를 베개 밑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남편뿐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까지 버리고 떠난 그녀에게 이 쪽지들은 아무 소용없었다. 어머니는 요나단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고향 피렌체 근교로 돌아갔다. 그런 지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요나단은 차가운 북쪽 나라의 차가운 아버지 곁에 남았다. 요나단 N. 그리프의 N이 ‘니콜로’의 약자라는 것은 비밀이다. 어머니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니콜리노. 사랑하는 내 아들. 띠 아모 몰토. 몰토, 몰토, 몰토(Ti amo molto. Molto, molto, molto, 아주 많이 사랑해)!”

그러나 어머니는 떠났다. 처음 3년 동안은 편지도 주고받고 전화도 하고 가끔 방문해서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 요나단이 사춘기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 앞으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엽서를 보냈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 요나단은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어머니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요나단은 왠지 섬뜩하게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글씨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빗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져 잉크가 살짝 번지자 요나단은 당황하며 손으로 빗물을 쓱 닦았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선 더욱 당황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그는 황급히 다이어리를 덮어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벤치에 올려두면 주인이 나중에 찾기가 더 쉽겠
지? 아마 가방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찾기 쉬우라고 그의 자전거 손잡이에 걸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자전거 자물쇠를 풀려고 숫자를 돌리던 요나단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에너지를 다 소진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빨리 집에 가서 제대로 된 아침을 먹어야 한다. 그는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몇 미터 달리자마자 맥박측정기는 175를 가리켰다.

그러나 3분 후, 힘껏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하마터면 자전거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냥 갈 수는 없다. 아무나 저 가방을 들고 가게 놔두면 안 된다!

요나단은 되돌아갔다. 다이어리가 든 가방을 집으로 가져가 차분히 방법을 모색해서 주인을 찾아주기로 했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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