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오셨어요?
* 본 시리즈는 2021년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부동산에서 나 무시하면 어떡하지?'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초짜인 거 다 티 나려나? 특히 저 보라색으로 염색한 아줌마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렇다. 난 여전히 부동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부동산 앞 인도만 20분째 왔다 갔다. 사람들이 나를 수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전셋집 구할 때와 내 집 마련을 할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부동산에 잘만 들락날락했는데 이렇게 투자 목적을 가지고 부동산에 들어가려 하니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부동산 투자를 하려면 꼭 극복해야 하는 일인데 왠지 오늘은 극복하지 못할 것 같다.
따르르르릉-
그때, 와이프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 부동산 가본다면서. 잘 다녀왔어?"
"그럼..! 잘 다녀왔지. 부동산에서 공인중개사분이랑 투자에 대해 이야기 좀 많이 나누고 나왔어. 글쎄 이야기하다 보니 한 시간을 넘게 앉아 있었지 뭐야. 있다가 집에서 봐~ 오늘은 닭도리탕이 좀 땡기네."
뚝.
거짓말쟁이 김북꿈. 와이프에게는 차마 아직 부동산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창피함 때문에.
이게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와이프에게 호언장담 해 놓은 게 창피해서라도 안 되겠다.
보라색 머리 아줌마가 앉아있는 부동산 바로 옆의 부동산.
이 아줌마는 조금 선해 보인다.
뽀글 머리에 눈도 살짝 쳐져 있다.
친절해 보이네. 이제는 진짜로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웃음으로 공인중개사에게 첫인사를 건넨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공인중개사의 눈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스쳐 지나간다.
스캐너보다 빠른 속도.
나를 한 번 슥- 스캔하더니 계속 모니터만 주시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마우스만 딸깍 딸깍. 뭐 아직 덜 끝난 업무라도 있는 건가.
한 30초 정도 멍하니 서 있으니 공인중개사가 드디어 입을 연다.
"아~ 어떻게 오셨어요? 전세? 월세?"
쳇. 나를 전세나 월세 구하는 청년으로밖에 생각을 안 하다니. 어이가 없다. 돈 없는 사람처럼 보였나. 이 아줌마 사람 볼 줄 모르네.
뽀글 머리 부동산 아줌마에게
내가.
오늘.
이 부동산에.
온 이유를.
또박또박.
이야기해준다.
풉 -
응?
모니터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저 뽀글 머리 아줌마가 지금 웃은 건가? 설마 비웃음? 분명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 뽀글 머리 공인중개사. 원래 투자자들을 대할 때 이렇게 하는 건가. 정말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나도 그럼 서 있을 필요가 없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야지.
풀썩-
소파에 앉아 아파트 단지 배치도와 동네 지도를 한 번 둘러본다. 공인중개사의 명함도 만지작 해보고, 옆에 있는 사탕도 만지작 해본다.
슬쩍- 나도 모르게 포도맛과 메론맛 사탕을 주머니에 넣는다. 아 30살이 되어도 사탕 앞에서는 애나 다름없구나. 윽..
그렇게 한 2분 정도가 흘렀나.
뽀글 머리 공인중개사가 드디어 입을 연다.
"총각~ 늦어도 너무 늦었어~ㅎㅎ 여기 이미 몇 달 전에 대구 투자자들이 버스 타고 와서 싹 쓸어갔어. 지금 물건이 하나도 없어. 그나마 있는 건 월세 낀 매물인데 총각 그 정도 돈은 없을 거 아니야? 그리고 총각 같은 사람이 부동산 들락거리면 부동산은 끝물이야~~ㅎㅎ"
할 말이 없다.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이 복덕방 아줌마랑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
휙휙휙-
본인 할 말만 다 끝낸 부동산 아줌마는 다시 마우스 휠을 바쁘게 돌려가며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자리에선 일어나지도 않고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안녕히 계세요.."
대놓고 나가라고 눈치 주는 부동산 아줌마와의 기싸움에서 확실하게 패배하고 부동산을 나온다.
이 바닥 기싸움 장난 아니네. 와이프가 보고 싶다.
일단 행동해 보고자 나왔던 투자 목적의 첫 부동산 방문에 나는 더 의기소침해졌다.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젠틀하게 차려입은 옷이 무색하게 처량함만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삑 삑 삑삑-
"여보 나 왔어~"
음. 칼칼한 닭도리탕 향기.
닭도리탕을 끓이던 와이프가 나를 보고 어이없다는듯 한마디 한다.
"북꿈아. 이러고 부동산 갔다 왔어? 네가 뭐 구준표야?"
이게 뭐 어때서.
반박할 힘도 없다.
이미 내 본능은 부엌에서 끓고 있는 저 칼칼한 닭도리탕에 가있다.
"닭도리탕 맛있겠다. 소주나 한잔하자."
도도독. 똑.
꼴꼴꼴-
「인생 참 쓰다.. 」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