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냉정한 시간은 남편의 장례식날을 기어코 불러냈다.
장례식은 엄마에게 이제 남편을 보내줄 준비를 하라는 사회에서 보내는 신호였다. 남편은 이제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남편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깨달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말소리, 눈앞에 보이는 사랑하는 남편의 영정사진과 같은 시각과 청각의 감각은 아직도 엄마에게 남편의 어쩌면 교통사고가 그저 한낱 꿈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지만, 촉각은 엄마를 현실로 데려다주었다. 상복으로 갈아입으며 처음으로 만져본 옷감의 표면, 장례식으로 찾아와 준 사람들의 스쳐가는 손길, 자신의 얼굴 위로 떨어지고 있는 눈물의 촉감은 지금 이 순간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일깨워주었다.
아직도 지금 당장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감싸던 손길, 따뜻하게 안아주던 포근한 느낌,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 떠올랐다. 문득, 이런 느낌이 떠오를 때면 마주하는 현실과 계속해서 충돌하였다.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촉감과 지금 현실에서 느껴지는 촉감의 충돌이었다.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금방이라도 전화하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힘들다고 얘기하면 달려와 안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정사진은 그 모든 것들은 가슴속 깊은 곳으로 넣어도라는 의미를 엄마의 시각적 정보에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었다. 현실을 외면할 수 없도록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내내 상기시켜 주었다.
슬픔은 높게 파도치고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이 파도를 잠재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사회가 정해준 시간 내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정된 시간 내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준호네는 영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생각이 엄마를 강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준호를 위해 현실을 꾸역꾸역 받아들였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멈출 수 없는 눈물의 연속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파도처럼 갑자기 몰려오는 뜬금없는 눈물에 시야를 맡겼다. 하지만 어서 빨리 남편이 없는 세상에 적응해야 했다. 준호의 엄마는 갑작스레 찾아오는 눈물에도 준호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눈물을 삼켰다. 준호에게 등을 보이는 일이 잦아졌다.
정신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온 후의 집안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분명 집안의 가구들의 위치, 조명, 물건들이 달라진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달랐다.
엄마의 눈에 아빠의 온기가 사라진 집안은 시퍼렇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 엄마의 눈에서 시퍼런 파란색을 제외한 색들을 볼 수 없도록 만든 것 같았다. 집안 전체가 시퍼렇게 차가웠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마주한 현실은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턱끝까지 들이밀었다.
엄마는 남편의 물건만 보아도 눈물이 흘렀다. 남편의 작업실 방은 엄마가 준호 몰래 아빠와 관련된 물건들을 치워놓은 장소였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충분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사회는 언제나 어른들에게 효율만을 권할 뿐, 적절한 시간 내로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적절한 시간 내로 슬픔을 이겨내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사회이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슬픔에도 마감기한이 붙어있다.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바쁜 어른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은 언제나 충분치 않았다.
세상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도 돌아가야 한다. 슬픔에 빠져 준호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만은 막아야 했다. 준호에게 냉정해 보이는 엄마의 모습은 준호를 위한 서투른 엄마의 생존방법이었다. 아빠가 남긴 물건들은 엄마에게 너무나도 소중했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존재해서는 안될 물건들이 되어버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 회사에 가지 못한다거나, 회사의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엄마는 나약해지지 않기 위해, 적절한 시간 내에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호가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 몰래 아빠의 물건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한꺼번에 몰려온 큰 슬픔을 다룰 줄 모르는 엄마는 슬픔을 꾸깃꾸깃 작게 고이 접어 준호를 위해 슬픔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