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아이들은 이제야 드디어 하얀 숲의 정체를 마주 할 수 있게 되었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의 키는 평소에 볼 수 있는 나무들의 크기와는 전혀 달라 마치 거대한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숲의 모습은 하얀 눈으로 덮여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높이의 웅장함이 숲의 위엄을 가리지는 못했다. 이러한 이질적인 점이 숲을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신비로움은 시간의 흐름마저 착각이 들게 만들어주었다. 천천히 눈이 내리는 모습이 세상의 시계를 느리게 가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천천히 내려오는 눈결정체들의 반짝임들이 숲을 휘감아 신비로움을 극대화시켰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아이들은 한눈에 하얀 숲에 매료되었다.
아이들이 숲에 도착하여 기뻐하는 것처럼 숲 또한 아이들을 반겼다. 숲은 언제나 진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반겼다. 사람들은 간혹 환상의 숲을 진실의 숲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숲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숲이 보여주는 환상 속에서 진실을 볼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볼 수 있는 자들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곧 숲이 보여주는 환상 속에서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닥칠 가까운 미래는 그러했다.
숲은 아이들에게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아름다운 눈을 점점 더 많이 불러왔다. 세상의 모든 눈을 불러왔다. 세상의 모든 눈을 불러온 숲의 계획은 가장 먼저 아이들을 뿔뿔이 흝어지게 만들어 고립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점점 숲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은 강해지고 있었다.
“앞이 안 보여!” 준호가 소리쳤다.
“어디에 있어? 나는 아예 코앞도 안 보여!” 준호의 목소리에 상우도 반응하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도 아무것도 안 보여!” 눈사람도 따라 소리쳤다.
순식간에 아이들과 눈사람 모두 시야가 가려 서로가 어디쯤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아무리 옆으로 팔을 쭉 뻗어보아도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조금씩 움직였던 아이들과 눈사람은 이제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다.
눈사람은 아이들과 떨어져 나뭇가지 팔을 쭉 뻗어 아이들에게 다가가려 하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눈사람이 걸어온 방향으로부터 멀리 달려오는 무리의 사람들 떼를 발견했다. 눈사람은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 얼굴에 붙어있는 젤리 눈을 떨어뜨렸다. 눈사람은 팔을 덜덜 떨며 젤리 눈을 집어 얼른 얼굴에 붙이고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정신없이 콩콩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사람들이 따라오기 힘든 길로 들어가기 위해 나무들이 우거진 곳으로 향해 달려갔다. 나무들을 헤치며 점점 더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사람을 따라오던 정체의 사람들은 피범벅을 하고 얼굴이 부서지거나 몸이 잘려나가 있었다. 준호네 집에서 보았던 네모난 상자 안의 그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무리의 사람들이 눈사람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숲 속은 눈이 많이 쌓여있어 눈사람의 몸집이 점점 커져갔다. 달리다가 몸이 너무 무거워 중심을 잃어 넘어졌다. 흥분해서 달려오는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분명 눈사람 쪽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눈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좀 더 복잡한 왼쪽으로 길을 틀어 달려보았다.
사람들은 눈사람을 따라 똑같이 왼쪽으로 길을 틀어 달려오고, 나무가 우거져 들어가기 힘든 오른쪽 길로 꺾어 달리면, 똑같이 길을 꺾어 달려왔다. 도대체 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사람들인지 알지 못한 채로 눈사람은 하얀 나무들을 헤쳐 무조건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계속해서 숲 속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눈사람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상우에게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눈사람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친구들의 위치를 알기 위해 팔과 다리를 쭉 펴 바닥과 나무기둥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런 상우에게도 바람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여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앞이 보이자마자 상우는 두리번두리번 준호와 눈사람부터 찾았다. 하지만 상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만 한 크기의 거대한 동물의 다리 네 개와 몸통이었다.
처음 보는 어마어마하게 큰 동물의 몸통이었기에 상우는 어떤 동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동물은 상우와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몸집이 얼마나 크면 상우가 그 위를 향해 쳐다보아도 너무 거대하여 머리가 어디에 달려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상우는 호기심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마치 혈관의 흐름이 느껴지는 듯 모든 감각기관이 곤두서있었다. 어떠한 생명체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위협이 될만한 존재인지 알기 위해 눈의 동공이 저절로 확대되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동물은 한 발자국씩 앞으로 향하여 상우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어서 일어나 이곳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상우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그 한 가지 생각만이 자리를 잡았고 친구들에 관한 생각은 완전히 잊힌 상태로 뛰기 시작했다.
거대한 크기의 동물이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울리듯 큰 소리가 났고 상우는 그 소리에 압도되었다. 아직 동물은 상우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거대한 몸집의 동물과 조금씩 멀리 떨어지며 위를 향해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떤 동물인 것인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우는 동물의 모습을 확인하고서는 너무 놀라 당황하여 미쳐 발밑을 보지 못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동물은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동물이 아니었다. 동물의 정체는 상우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공룡’이었다. 과학자들이 몰래 이런 숲 속에 공룡을 만들어 놓았던 것일까? 상우는 영화를 보고 종종 이런 일들을 상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정말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상우는 숲 속 나뭇가지들이 부딪힐 때마다 차가운 눈을 자신의 얼굴에 뱉든 말든 계속해서 전 속력으로 숲 속 더욱 깊은 곳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무들과 험난한 바위 사이로 빠르게 뛰어다녔다. 상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거대한 공룡은 더 이상 상우 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상우와 키가 비슷한 작고 날렵한 공룡 여러 마리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상우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 가쁘게 전속력을 내어 숲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준호의 옆에는 이미 눈사람도 상우도 사라져 있어 아무리 팔을 멀리 뻗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람소리만이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바람소리는 잦아들었고, 어디선가 무리의 사람들이 와다다다 달려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부터 몰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를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좀 더 빼며,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준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상한 살색의 점성이 있는 액체와 같은 형태를 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나는 버블 같은 것이 몰려오고 있었다.
‘왜 이상한 액체괴물 같은 것들이 몰려오는 거지?’
우드드드 다가오는 버블은 거대한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준호 코 앞까지 다가왔다. 준호는 이제야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살색의 액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부글부글 동그란 기포들을 내뿜으며 증식하고 있었다. 점점 몸집을 불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무엇인지 몰라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준호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액체괴물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덜 침범할 것 같은 힘든 길로 들어가기 위해 나무들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나무들을 헤쳐가며 뛰었다. 중간중간 눈 속으로 발이 빠지기도 하고 마주치는 바위에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상처가 나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쉬지 않고 달렸다.
분명 준호를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준호가 왼쪽으로 길을 틀어 달리면, 똑같이 왼쪽으로 길을 틀어 달려오고, 나무가 우거져 들어가기 힘든 오른쪽으로 길을 틀면 똑같이 오른쪽으로 달려왔다. 나무가 더 빽빽이 들어서있는 지역으로 오자, 액체의 속도가 조금 줄었다. 준호는 뛰면서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슬쩍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가까이서 본 버블에는 어떠한 이미지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준호는 이상한 버블의 정체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버블 안에 갇혀있는 것들은 아빠가 돌아가신 날의 병원에서의 기억, 아빠의 죽음으로 엄마가 치워놓은 아빠의 물건들에 대한 기억, 학교에서 다시는 보지 못할 아빠의 얼굴이 떠오른 기억, 준호의 상상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 혼자가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진 준호와 같은 머릿속 준호를 괴롭히던 것들이 비쳐 보였다. 준호의 머릿속에서 그렇게 준호를 괴롭혔던 놈들이었다.
준호의 머릿속에서만 있던 버블은 이제 실체를 가지고 준호를 쫓아오고 있었다. 준호가 숨이 차 잠시 속도를 늦추자, 어느새 버블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버블의 기포들은 준호를 잡아먹으려 작정한 듯이 높이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버블이 거대해져 파도처럼 높게 일어서 나무들을 덮칠 준비를 마쳤다. 거기다 버블 안에 있는 기포들은 점점 커져 곧 터질 것처럼 보였다. 준호를 버블을 멈출 수 없었다. 분명 준호가 만들어낸, 준호의 머릿속 버블들이었지만, 준호의 두려움이 작아질 수 없듯, 준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액체괴물의 파도가 우뚝 일어서 준호를 향해 덮칠 준비를 마쳤다.
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액체괴물이 된 버블 안에 갇힌 준호는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최대한 위로 쳐들고 괴로움에 팔, 다리를 발버둥 쳤다. 하지만 준호의 괴로움은 물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액체 괴물 안에서 준호는 병원 복도 안에서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얼굴과 집에 혼자 남아 아빠의 물건들을 보며 괴로워하는 자신의 얼굴, 학교에서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얼굴, 혼자 남게 될지도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버블들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모습들이 자가번식하여 준호에게 들이댔다.
준호는 버블 속에 있는 기억들을 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고, 그러는 동안 액체 괴물은 숲이 원하는 곳까지 준호를 데려다 놓았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고요함이 준호의 눈꺼풀을 깨웠다.
액체괴물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준호는 어딘지도 모를 하얀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이상한 문이 나타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