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의 사회적 책임과 갈등
자기소개서에서 우리를 정말 곤란하게 하는 질문이다.
한때 나도 합격하기 위해서 열심히 자소설을 쓰다가 이 질문을 보고 너무 답답해져서 그냥 내가 솔직히 하고 싶은 말을 무작정 써 SNS에 올렸던 적이 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질문 : 자신의 단점에 관해 기술하시오.”
저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상하신 아버지와 친절하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의사이신 아버지는 항상 부족함 없는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해주셨고 어머니는 본인의 청춘을 아낌없이 자식을 위해 쏟아부으신 분이었습니다. 자기소개서 컨설팅 전문가가 절대 소개서에 쓰지 말라고 하는 문장이지만 굳이 이렇게 적는 이유는 이것이 제 본질적인 단점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감사하고 자식을 위해 본인의 인생을 그렇게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자란 덕에 저는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연구할 때 항상 제 연구가 탁상공론이 되지는 않을까 경계합니다. 학교에서 학부모 위원을 맡으신 어머니 덕분에 담임선생님의 특별 케어를 받으며 자란 주제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거나, 있으나 마나 한 부모를 둔 아이들을 위한 정책을 감히 연구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끔 엘리트 집안에서 자라나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겨움이 치밉니다. 사실 이 역겨움은 저 자신의 위선에 대한 역겨움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제 어머니 차를 얻어 타고 같이 집에 가던 친구가 “야 넌 인생 진짜 편하게 산다.”라고 말한 것이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우리 부모님 차 얻어 타고 가는 주제에 그렇게 말해야 하나 싶지만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소개서에 쓰기에 부적절한 내용처럼 보여도 이 단점은 제 본질로 이야기하지 않고는 다른 단점을 이야기할 수 없고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소설이면서 또 다른 위선입니다. 컨설팅 전문가분이 자기소개서에 적는 단점은 그것을 극복해 장점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 단점은 장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제 단점을 스스로 인지하고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빛나는 귀교에 지원하며 경멸해 마지않는 제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고백한다는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욕심껏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으려다 보니 서두가 길어졌다. 어색하리만큼 긴 시작이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이유로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게 고통스럽다는 점을 미리 밝혀둘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사회적 역할과 봉사하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굉장한 직업적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 같고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선망받을만한 인간이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정치인들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위선을 떨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미리 이러한 양심선언을 한 다음 약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약사를 포함한 보건의료계열의 직군은 환자의 건강에 관여하는 직업의 특성상 외면해서는 안 될 사회적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해서 약사, 의사, 간호사들이 온전한 자원봉사자인 것은 아니다. 이들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손익에 신경을 써야 하고 경제적인 이윤을 남길 필요가 있다. 이러한 약사의 ‘사회적 헌신’과 ‘개인적인 이득’은 전혀 상반되는 가치이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 종종 충돌이 발생하곤 한다.
한 번은 약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본인이 이런 가치 갈등을 실제로 경험해본 사례에 대해 이야기 해준 적이 있다. 그날 친구는 평상시처럼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지었는데 약을 거의 다 지었을 무렵 의사가 낸 처방전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약사라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과도하게 많은 양의 약이 처방돼 있었지만 이미 약을 토막 내 반 알씩 포장을 마쳤기 때문에 약을 회수한들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약이 그대로 나가면 약국은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지만 환자의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고, 의사에게 연락해 다시 처방을 받는다면 환자는 괜찮아도 이미 쪼개진 약에 대한 손해를 약국이 고스란히 떠 앉게 된다. (환자부담금이 적어서 그렇지 실제 약 값은 매우 비싼 경우도 많다.) 약사의 사회적 책임과 경제적 이득 사이에 가치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다.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은 2005년 칸영화제 수상작이지만 국내에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좋은 장면이 워낙 많은 영화이지만 그중에서도 이 금붕어 씬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법하다. 감독은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를 이 특별한 장면을 통해서 전달한다.
앞의 차가 깜빡하고 금붕어를 차 위에 올려놓은 채로 출발하는 바람에 금붕어는 죽을 위기에 놓인다. 다음은 뒤차에 탄 여주인공과 남자 배우가 이 불쌍한 금붕어를 보고 나누는 대화이다.
“크리스틴, 저거 봐.” 여주인공 옆에 탄 할아버지가 그녀를 부른다.
“헐. 창문 좀 내려봐요. 앞 차한테 이야기해줘야겠어요.”
“안돼. 그 차가 멈추면 금붕어가 떨어질 테고 그 차가 속도를 늦춰도 금붕어는 떨어질 거야. 금붕어가 살아남는 방법은 저 차가 저 속도로 계속 운전하는 방법밖에 없어. 영원히.”
“그럼 아마 지금이 저 금붕어에겐 마지막 순간일 것 같네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여주인공은 차창 밖 금붕어를 보며 이야기한다. “나는 너를 모르지만 네가 사랑받았다는 것을 알고 죽었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사랑해.”
‘생명’이 소중하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보편적인 윤리이다.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 살해를 저지르거나 생명을 해치는 행동을 했을 때 ‘인간성’을 상실했다고도 이야기한다. 약사가 사회적 책임을 가지는 이유도 약사의 역할이 이러한 생명과 연결돼있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와 약사의 직업이 연결되는 한 약사는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할 사회적 책임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문제는 물질 만능인 사회에선 건강과 생명도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의료보험으로 국가가 일정 수준을 부담하긴 하지만 여전히 환자가 지불해야 할 금액이 존재하고 생명을 지켜주는 행위에 돈이 오고 간다. 아직까지 인류가 이보다 나은 체제를 발견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슬프게도 여기서 돈으로 생명을 사는 행위를 마구 비판할 수는 없다. 결국 생명과 돈이라는 아주 달라 보이는 두 개념이 약국이라는 공간에서 만나게 되면 이 둘은 언제고 스파크를 튀기며 환자와 약사를 곤란하게 만든다.
약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안정적이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아니면 하얀 가운이 멋있어 보여서…. 물론 약사는 꽤나 안정적이고, 돈도 아쉽지 않게 벌고, 그리고 때때로 멋있기도 한 직업이다. 그렇지만 이런 매혹적인 특성들 외에 약사가 보건의료인으로서 내내 생각해야 할 무거운 책임이 존재하고 때로는 책임과 돈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는 걸 미리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다음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