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월요일

by 라온써니

글쓰기 선생님께서 오감을 활용하여 글을 써보라고 숙제를 내주셨다. 후각과 촉각에 대해서는 써본 적이 없어서 난감했다. 월요일 출근길에 오감을 한번 총동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월요일 아침이 되니 일요일에 남편과 싸워 글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아졌다. 게다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신발장에 있던 앵클부츠를 꺼내 신었는데 밑창이 가로로 쩌 억~ 갈라지는 거다.


2년 전 건강검진 때 수면내시경 신청했다가 저혈압이라 안된다고 해서 7만원 환불받고 일반 내시경으로 만신창이가 된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산 신발이다. 다음 달에 또 건강검진 신청한 거 어떻게 알고 망가지는 걸까? 이번에는 꼭 수면내시경 성공해야 하는데... ... 어쨌든, 이미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버려 걷기 불편했지만 다시 집에 가면 지각할 것 같아 그대로 출근했다. ‘아침부터 이게 뭔 꼴이람’ 기분이 처참했다.


저 멀리 버스가 온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버스가 서서히 정차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정확히 내 앞에 멈추어 서는 거다. ‘어라~ 이런 일은 올해 처음이야.’ 빈자리가 2자리였는데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유튜브에서 음악을 검색하다가 ‘2020 듣기 좋은 팝송 모음’이 있어 틀어보았는데 누구 노래인지 전혀 모르지만 듣기가 좋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따뜻한 히터가 나오는 행운으로 차지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아보니 기분이 살짝 풀린다. 남편 때문에 열받는다고 하루를 망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다독여 본다.


어제 읽었던 공지영의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생각났다. ‘그래서’ 행복한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져야지. 웬 남자가 내 옆에 서서 책을 본다. 혼잡한 버스임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 책을 들고 위태롭게 서있다. 저렇게 전투적으로 책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이다. 글을 쓰기 위해 주변을 세심히 관찰하니 사소한 것도 글감이 된다.


오늘은 2020년에 신규 임용된 분들 중 3분이 우리 기관에 현장 체험을 하러 온다. 영화 마케팅, 출판사 근무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들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 어떤 분은 3번 도전 끝에 합격하셨다는데 다른 일을 하다가 접고 3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가슴에 명찰을 달고 합격의 기쁨이 채 사라지지 않은 호기심과 열의에 찬 눈빛을 보니 나에게도 신선한 기운이 전해진다.


각자가 도서관에 들어오면 이런 일을 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도서관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들어온 직원도 알바로 일할 때 느꼈던 직원의 이미지와 자기가 직접 겪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나를 돌아본다. 도서관에 대해 횡설수설 소개하면서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도서관에 들어와서 가장 좋았던 점, 예를 들면 책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고,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하면서 보람되었던 점 위주로 이야기한다. 꿈과 희망을 꺾으면 안 되지. 몇 시간 떠들고 나니 진은 다 빠졌지만 억지로라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이상하게 기분은 좋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다. 나는 같이 먹는 도시락 팀이 있다. 오늘은 샐러드에 고구마 맛탕을 싸왔다. 지금까지 직장 생활하면서 가장 즐거운 점심 멤버다. 나처럼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큰 사람들이 모여있다. 서로 말하려고 하는 바람에 자주 오디오가 겹치며, 멤버들은 왜 말을 끊냐고 투정을 부린다. 그러면서도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왁자지껄한 점심시간이 너무 좋다. 멤버 중 쿠킹 클래스를 다니시는 분이 있는데 가끔 수업 시간에 만든 과자를 가져오신다. 나는 밀가루 알러지가 있어서 못 먹고 항상 집에 가져가 딸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번 수업 시간에 글루텐 프리 빵을 만들었다며 바나나 모양의 빵을 주신다. 아~ 고소한 빵 냄새 맡아본 지가 언제인가? 고소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빵을 음미하고 있으니 횡재를 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


점심 식사 후 친한 동료와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갔다. 제일 싼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서비스로 머랭 쿠키를 주시는 거다. 또 이건 무슨 횡재인가? (머랭 쿠키는 달걀흰자로 만들어 내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쿠키다) 무지개색 쿠키의 자태가 아름답다. 밀가루 알러지가 있는 나는 먹을 수 있는 디저트를 발견하면 쉽게 흥분한다. 시큼한 커피와 달콤한 머랭 쿠기의 조합은 나를 들뜨게 하였다.


오후에는 도서관 홈페이지에 게시되는 추천도서를 쓰고자 그림책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어제 본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오르게 하는 책이 있는 거다. 나에게 메시지를 주는 건가?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서평을 쓰면서도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내가 쓴 서평이다.


여름,/이소영/글로연


시선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요.


이 책은 더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여름을 축 늘어지는 뱃살, 칭칭 감기는 물뱀, 느린 발걸음, 쏟아지는 땀 등으로 표현했어요. 너무 힘들어 ‘시간아 흘러라, 흘러라’ 주문을 외우는군요. ‘내일도 똑같을까?’ 하며, 좌절하다가 어느 순간 ‘이제 그만’이라고 외칩니다. 생각을 바꾸는 순간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들어와 쉬라고 무성했던 여름 나무와 맛있는 과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완벽하지 않고 때론 견디기 힘들지라도 생각을 열고 시선을 바꾸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숨어있던 것이 보일 수 있도록 잠시 여유를 가져보라고 말이죠. 더위를 형상화한 여름이의 짓궂은 표정과 심리 변화를 보여주는 화려한 색채의 삽화는 보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여름,/이소영/글로연

내일도 똑같을까


여름,/이소영/글로연

닫힌 생각 속에서 기억 또한 희미해질 즈음


여름,/이소영/글로연

이제 그만!


생각해 보니 오늘은 특별한 일이 많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일상을 세심히 관찰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덕분에 남편 때문에 속상한 것에 함몰되지 않고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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