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고 싶다면,
나란 인간, 도대체가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세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혹은 나를 사랑하지 못했어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등의 고백들이 넘쳐날까?
이런 "자신을 사랑하세요"란 종류의 모든 메시지들이 정말 싫었던 적이 있다.
자기 계발서, 베스트셀러 에세이, 최신 소설, 명언집 등 거의 모든 책들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꼴도 보기 싫고, 들어도 불편하기만 한 이야기.
자신을 사랑하라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뭔가 근사한 폼만 잡고 던지는 메시지 같아 거부감만 커질 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방법도 알려주지 않은 채
제발 사랑을 하세요, 사랑해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니까요!라는 말은 나를 향한 회초리와도 같다.
나 또한 '그래, 나를 사랑해야지'라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나 자신이 싫어지고, 세상으로부터 숨어 버리고 싶고,
도대체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매일의 일상에서 희망 한 조각 찾지 못할 때...
그럼에도 다 포기해 버리기엔 미련이 남아 뭔가 길을 찾으려다 보니 다들 '나를 사랑하라'라고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 "나를 사랑한다" "사랑해, **야"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문처럼 나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사랑한다'라는 생각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점점 극명하게 일깨워줄 뿐.
그 생각마저 버리고, '그냥 에잇, 그냥 이렇게 살다 때가 되면 죽든 살든 다 포기하자. 그냥 막살아도 누가 뭐래?'라고 생각하며 그저 해 뜨면 할 일을 하고, 해지면 잠자고... 내 삶의 의미, 목적, 희망, 남편과 자식에 대한 욕심과 바람도 다 외면해 버리고 묵묵히 일상을 살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이 며칠, 몇 주, 몇 달이 쌓이면서 어느 날 갑자기 열심히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이룬 건 없었다. 목표가 없었으니 어떤 성과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의미나 소망도 없었으니 뿌듯한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쌓인 시간만이 남았다.
'이렇게 살다 그냥 죽으면 그만이지 뭐, '라던 생각으로 살았건만, 내가 내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사실. 무너지지 않고 버텨주고 있는 내 일상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해야지', 나 자신을 향해 '사랑해, 사랑해'를 주문처럼 외우던 시절엔 그렇게도 갑갑하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린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묻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 주곤 한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의 말씀처럼 "꾸역꾸역"... 이 속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꾸역꾸역.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이 말은 존경과 감사를 담은 표현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예쁘든 아프든 모자라든 부모는 꾸역꾸역 사랑을 주고, 선생님은 꾸역꾸역 바른길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꾸역꾸역 해내는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로또 당첨 같은 대단한 행운이 아닙니다.
맛있는 식사, 소소한 수다, 기분 좋아지는 장난, 심지어 매일 같은 길을 발 딛고 걷는 행위처럼, 작고 사소한 일상의 행복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의 지혜>, 저자 김경일, p.77
내가 또다시 미워지는 때면, 나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해야지' '사랑해, 사랑해' 고백하는 순간, 당최 사랑할 수 없는 내 모습만 커질 뿐이다.
루틴을 더 철저히 지키고, 작은 일에도 정성을 쏟고, 더 깨끗이 청소를 하고, 더 많은 필사를 하고, 더 많은 글을 써 본다. 그렇게 일상을 살다 보면 로또가 당첨되는 행복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문득 소중하거나 감사하거나 즐겁게 느껴지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매일의 이런 일상들이 쌓이면, 문득 또 그 일상을 사랑하게 되고, 내 일상이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되는 순간, 비로소 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고백을 멈추고, 일단은 꾸역꾸역 살아갈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