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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떨어지는데 무엇이 좋은가요?

혼불

by 소리


덥다, 덥다 하던 여름이 언제였나 싶게, "어?....." 하며 서늘한 바람에 움츠리다 금새 춥디, 춥다를 연발한다.

땅에 떨어진 낙엽들이 아직 낯선 것은 또 쏜 살같이 흘러가 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 어느덧 후반기로 접어든 한 해가 믿기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무들을 올려다 보니 얼마전까지 빽뺵하게 무성했던 나뭇잎과 꽃잎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군데 군데 빈 공간이 사이로 앙상하게 보이는 가지들이 덩그렇게 하늘로 뻗어 있다.

가을 초입, 유독 크게 느껴지는 마음의 빈 공간처럼 그걸 닮은 가지들이다. 저 사이로 오늘같은 찬 바람이 스칠때 나무들도 추워서 몸을 움츠릴까.


굳건한 다짐으로 출발한 올해 초부터 불과 얼마전 무더위기 느껴지는 여름까지 열심히 살지 않았던 건 아닌데, 오히려 아둥바둥 최선을 다해 살아온것 같은데 여전히 나는 그대로이지 않나... 찬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초조함, 기다렸다는듯 이어서 고개를 쳐드는 무력감에 몸도 마음도 기운이 빠진다.

내 몸에 밧데리가 있다면 20%-30% 밖에 남지 않은 빨간 불을 보게 될 것이다.


"매화낙지?"
"매화 매(梅), 꽃 화(花), 떨어질 락(落). 따 지(地), 그렇게 쓰지."
"꽃이 떨어지는데 무엇이 좋은가요?"

"이 사람아, 꽃은 지라고 피는 것이라네. 꽃이 져야 열매가 열지. 안 그런가? 내 강아지."


<혼불>에 나오는 강모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이다. 할머니 청암부인은 어린 강모를 무릎에 올려 앉히며 궁둥이를 토닥여 주며 이렇게 말해 준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지, 옛 잎이 떨어져야 새 잎이 돋아나지..."


이렇게 말해주는 할머니는 안 계시지만, 대신 나에게는 이렇게 말해주는 문장이 다가와 토닥여 준다. 내 속의 공허와 상실감을 알아챈 누군가처럼 온기를 머금고 있다. 앙상하게 남은 빈 가지들이 내 신세인 것만 같았는데,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그렇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지...

잊고 있었던 우리 인생의 오묘한 인과관계를 다시한번 떠올려 본다.


떨어진 꽃 잎 덕분에 열매가 맺는다는 사실,

실패라 여겼던 시간들이 또다른 길을 열어주었던 사실.

무의미하게 참고 견딘줄 알았는데 더 멀리 뛸수 있는 힘이 되었던 사실.


이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빨간불이 들어왔던 밧데리에 충전기가 연결되는 듯 하다.

바람이 몰고오는 초조, 별반 달라진것없는 일상, 초가을의 우울과 무력감이 이 문장 하나로 말끔해지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 감정에 마음을 담그지 않기로 '결정'했다. 감정에서 한 벌 떨어져서 담담하게 지켜보기로 한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 떄면 이렇게 감정을 '결정'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꽃은 지라고 피는 것이라네.
꽃이 져야 열매가 열지? 안 그런가?



내가 피우려던 꽃이 져버렸다고 실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졌다는 건, 이제 열매를 맺을 차례가 되었다는 것.

벌써부터 이룬 것이 없다는 자책감에 무기력해지지 말 것이다.

남은 2장의 달력에는 열매맺는 시간이 담겨 있다.







♣ 북(Book)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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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불> 1권, 최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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