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세계를 마주하자
- 쓸모없어 보이는 취미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순간들.
- 게임으로 '연민'을, 캠핑으로 '사랑'을, 독서로 '지식'을 배우다.
- 취미의 쓸모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록한 안내서.
우리는 종종 취미를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브런치북은 평범해 보이는 게임, 캠핑, 독서를 통해 취미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탐구합니다. 취미가 어떻게 저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그 여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의 취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한때 나의 전부였던 게임을 만들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졌다."
"죽음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을 되찾게 해준 것은 바로 캠핑이었다."
게임이라는 취미가 직업이 되어, 스물여섯 살에 첫 회사에 입사했다. 취직까지의 과정은 지난했지만, 게임 개발을 꿈꾸던 아이는 마침내 원하던 게임 개발자가 되었다.
그러나 게임 업계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순수한 열정이 곤혹스러워졌다. 회사의 최우선 목표가 이익 추구다 보니, 게임의 재미보다 매출을 우선해야 했다. 그 상황에 점점 지쳐갔고, 좋아하던 게임마저 싫어 지기 시작했다.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첫 직장에서 퇴사했다. 꿈과 현실의 괴리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퇴사 후 구직 기간 동안, 나는 회사를 떠난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결론은 회사의 문제가 아닌, 게임 업계에 대한 나의 순수한 기대가 문제였다는 것이었다. 이를 알아차리고 현실을 직시한 채 두 번째 회사에 취업했다.
첫 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과 타협점을 찾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매출이 개발자의 성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매출 요소를 찾아 나섰다. 재미는 주관적이고 보이지 않는 성과였지만, 매출은 객관적이고 명확했다. 기존 게임 요소들을 꼼꼼히 분석한 후, 수익을 높일 수 있는 장치들을 고안해 팀장에게 제안했다.
제안한 장치들이 예상 이상으로 잘 작동했다. 개선 사항이 반영되자 매출이 오십 퍼센트가 상승했고, 이후 제안들도 좋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팀장의 칭찬은 없었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겠지'라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았다. 내 아이디어가 잘 작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
어느 날, 평소 내가 따르던 동료가 대화를 요청했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가 속삭였다. "매출의 공을 팀장이 다 가져가는 것 같아." 그러더니 일하지 않는 팀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회사의 보이지 않는 정치에 휘말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내 일만 잘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두 번째 회사에서 1년을 버텼다. 하지만 그 신념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도 동료와 함께 팀장을 비난하고 있었다. 회사 옥상은 담배 피우며 팀장 험담을 나누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사실 팀장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출근해서 인터넷 쇼핑이나 메신저로 잡담하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묵인했던 건, 첫 회사에서 배운 교훈 때문이었다. 유능함은 결국 살아남음으로 증명된다고 믿었기에, 20년 경력의 팀장은 그저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고 여겼다.
나의 신념은 빠르게 정치에 삼켜지고 있었다. 얼마 후, 함께 팀장을 비난하던 동료가 결국 퇴사를 선언했다. 그의 퇴직서 사유란에는 단 한 단어, '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개 개인 사정이나 이직으로 퇴사 이유를 둘러대는 것과 달리, 그의 행동은 무능한 팀장 밑에서 더는 일할 수 없다는 강력한 항의였다.
그의 결단은 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잃어버린 채, 나는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 내 성과를 가로채고 제대로 일하지 않는 팀장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다. 무능한 팀장으로 인해 내가 무능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동료의 퇴사 요청은 부서 이동으로 마무리됐다. 나는 퇴사할 생각은 없었지만, 동료처럼 무능한 팀장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료의 퇴사 사건 발생 3개월 후, 나는 팀장에게 부서 이동 면담을 요청했다. 신규 개발에 대한 열망을 사유로 들었고, 마침 사내 신규 개발팀에서 인력을 찾고 있었다.
팀장은 무표정하게 "알겠다"는 말만 남기고 면담을 끝냈다. 다행히 이동이 결정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인사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직속 상사가 내 고과에 대해 부정 의견을 남겼기에, 부서 이동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부서 이동 실패 후, 다시 팀장과 면담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 팀에서 받아줄 수 없으니 퇴사하라"는 팀장의 차가운 말이 면담을 끝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퇴사 절차가 시작됐다. 인사팀에서는 나에게 사직서를 내밀었다. 사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다시 사직서를 내밀었다. 사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팀에서는 암묵적으로 '퇴사자' 처리가 되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업무도 주어지지 않았다. 부서 이동 면담 일주일 만에 나는 팀의 유령이 되어 있었다. 출근은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묘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부서 이동이라는 모험을 시도한 것과 회사 정치에 휘말린 것에 대한 후회가 나를 짓눌렀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내렸고, 베개는 눈물로 축축해졌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자진 퇴사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버텼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나를 갉아먹었다. 입맛이 사라졌고, 피부에는 트러블이 생겼다. 예민함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주변의 모든 것을 베어내고 있었다. 당시 여자 친구가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녀는 내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라 괴로워했다. 그녀의 무력감 어린 표정을 볼 때마다 마음이 더 아팠다.
사직서를 내민 지 한 달이 지나서야 회사는 권고사직을 제안했다. 더는 버틸 힘이 없어 받아들였다. 내가 버틴 대가는 회사의 위로금이 아닌 국가의 실업급여였다. 짐을 싸 들고 회사를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울었다. 공허함이 몰려와 죽음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지 인터넷을 뒤졌다. 부모님께 남길 편지를 쓰고 한강을 찾았다. 다리 위에서 망설이며 서 있던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죽을 용기조차 없는 나를 원망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마음의 파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죽음은 곁에서 멀어졌지만, 삶의 의욕은 여전히 되찾지 못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나는 컴컴한 방에 몸을 웅크린 채 며칠을 보냈다. 한때 나의 전부였던 게임을 만들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졌다. 권고사직의 상처는 어릴 적부터 나를 지탱해 온 게임마저 증오하게 했다.
여자 친구는 이런 나를 보며 애태웠다. 그녀는 인내심 있게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내가 죽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며, 우리는 담담히 이별을 맞이했다. 고맙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4년 간의 행복했던 연애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권고사직과 이별로 얼룩진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강을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본 아웃도어 매장이 떠올랐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초록색 무늬의 텐트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디서 봤던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마당에 쳤던 텐트와 비슷했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캠핑의 추억이 떠오르자, 마음속 짙은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그 순간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굽은 몸을 펴고 문을 나서서 그 매장을 방문했다. 여전히 초록색 무늬의 텐트가 전시되어 있었다.
직원에게 텐트 가격을 물어보니 내게는 너무 비쌌다. 다음 달 카드 비용도 빠듯한 상황에서 실업급여 외에는 수입이 없었다. "혹시 더 저렴한 텐트는 없을까요?" 질문을 들은 직원은 잠시 창고로 들어갔다가 작은 원터치 텐트를 가지고 나왔다. 펼쳐서 던지기만 하면 자동으로 설치되는 간편한 텐트였다.
입구 쪽에 초록색 무늬가 있어 마음에 들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고민 없이 구매를 결정했다. 텐트를 사 들고 나오는 순간, 퇴사 후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작은 텐트가 내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 마음의 치유를 위한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갈까?' 인터넷 지도를 펼치며 고민했다. 어릴 적 부모님과 갔던 감포 바다가 떠올랐지만, 서울에서 너무 멀었다. 대신 서울 근교의 한적한 곳을 찾았고, 경기도 가평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해 보이는 캠핑장을 예약했다.
첫 캠핑이라 준비물이 막막했다. 일단 먹을 것부터 챙겼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반찬용 아이스박스에 김치를 담고, 냉동실의 삼겹살도 넣었다. 가방에는 휴대용 가스버너, 프라이팬, 젓가락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텐트를 들고 집을 나섰다. 서툴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첫 캠핑을 향해 떠나는 순간,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동안 계절의 변화를 놓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니 어느새 따뜻한 봄이 지나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와 있었다. 4월부터 시작된 고통이 7월에 와서야 조금 무뎌진 것 같았다. 운전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내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캠핑장에 도착하자 짙은 녹색의 숲이 나를 반겼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적했다. 사장님의 설명을 떠올리며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에 앉아 멍하니 숲을 바라보다 청설모 한 마리가 울창한 잣나무 숲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어릴 적 경험했던 자연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잊고 있었던, 아니 어쩌면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세계를 다시 마주하자 안도했다.
방에 갇혀 있을 때는 배고픔조차 잊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출출함을 느꼈다. 가방에서 휴대용 가스버너와 프라이팬을 꺼내 해동한 고기를 구웠다. 그 순간 감포 바다에서 캠핑할 때 먹었던 어머니의 '주물럭'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이 안온했던 건 부모님의 사랑과 자연의 품 덕분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새까만 죽음이 곁에 바싹 붙어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 녹색 숲에 들어서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초록빛 논과 밭,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과 춤추는 곤충들, 붉게 타오르는 해와 아지랑이로 감실거리는 땅. 죽음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을 되찾게 해준 것은 바로 캠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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