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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Nov 25. 2023

출장, 그리고 트라우마(1)

시작부터 별로였던 나의 첫 해외출장

29살이었다. 내가 다니던 직장은 해외출장의 기회가 많았지만, 당시 계약직이었던 나는 해외출장은 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장 기회는 주로 정규직에게 주어졌고, 처음에는 출장이 가고 싶었지만 과업무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라 출장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랬었다. 그리고 그렇게 10월이 왔는데, 갑자기 인도네시아 콘텐츠 트립 명령이 떨어졌다. (콘텐츠 트립을 가게 됐다는 건, 영상 업체와 동행함을 의미한다.)


사실 이 내용을 글로 쓰기까지 생각이 많았다. 제목에 직설적으로 이 사건이 내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회사에서도 이 일 이후로 나에겐 해외 출장거리를 맡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쨌든 커리어적 자존심에도 상처를 남긴 일이 되겠다. 여하튼 그랬다. 처음으로 가는 출장이었지만, 과업무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특히 어깨뿐 아니라 등에도 담이 오는 등, 출국 며칠 전까지 나는 알 수 없는 근육통과 피로,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다. 지금이라면 이 모든 게 하나의 신호라는 걸 알아채고, 하다못해 침이라도 맞으러 다녔겠지만 당시 나는 정말 내 몸과, 내 상태, 즉 '나'에 대해 굉장히 무지한 사람이었다.


"대리님, 대리님 출장 가실 때 허리 아픈 약 어떻게 가져가셨어요?"

"왜?"

"저 이번에 출장 가는데, 갖고 있는 편두통 약을 많이 가져가려고요. 이거 공항에서 뺏기면 큰일인데..."

"아, 나는 아예 의사 진단서를 받아서 같이 들고 갔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늘 그렇듯 편두통 약만 잔뜩 챙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 허리디스크로 진통제를 달고 살던 옆자리 대리님에게 해외출장 시 평소보다 '많은' 양의 약을 어떻게 반입하는지 물어봤고, 반차를 내고 편두통 조제약을 받으러 갔다. 한 번에 최대 7일 치, 즉 21 봉투의 약만 받을 수 있었지만, 설마 5박 6일 출장에 21개의 약이 부족할까 싶어서 안심했다. 이 표현이 맞다. 나는 두툼한 편두통 조제약 봉투를 보며 무척이나 안심했다. 


오래된 사진첩을 뒤져보니 이런 게 나왔다. 비행 중 사진을 찍었더라. 시작은 좋았다. 시작은.

시작은 좋았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한국에서는 맡을 수 없는 인도네시아 특유의 냄새가 났다. 한국이 추워 겹겹 니트를 껴입었더니, 막상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척 더워 화장실에 가서 반팔로 환복 했다. 전 세계에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화장실은 거의 탈의실 수준이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낯선 공기에 신이 났다. 외국에 왔다는 사실과, 그래도 (매우 어색하지만) 영상팀과의 첫 출장이었기에 잘해야겠다는 의욕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게 괜찮았다.


작은 섬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우리가 촬영할 지역은 발리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한 번 더 들어가야 하는 흩어진 작은 섬들 중 하나였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담당자와 촬영할 곳을 둘러봤다. 날이 얼마나 더운지 가져갔던 옷이 흠뻑 젖었다. 정수리가 뜨거워 스카프로 가렸다. 그 모습이 마치 차도르를 한 여인 같았다. 하루종일 더위를 뚫고 다니느라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숙소덕에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낯선 침대에서 푹 자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자긴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머리에 낮고 깊게, 음침하게 퍼진 고통을 느꼈다. 편두통이 찾아온 거다. 


재수 없게도 오심을 동반한 두통이어서, 대충 한국에서 사간 '참 붕어빵'을 하나 꺼내 우걱우걱 먹고 약을 먹었다. 새우자세로 꼬부려 눕기도 어려운 게, 이미 밖은 식사소리로 가득했고, 식사를 건너뛴다 해도 당장의 촬영분을 소화하러 나가야 했다. 보통 조제약(미가펜)을 먹으면 정말 빠르면 30분, 늦어도 1시간 정도면 오심이라도 잡히는데 반응이 전혀 없었다. 머리는 더 아팠고 속은 더 메슥거렸다. '편두통 발작인가?(*이것도 나만의 용어인데 두통약이 듣지 않고 구토를 하는 익스트림 편두통 상태를 의미한다. 이럴 때는 약조차 토하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진통주사를 맞았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머리는 더 아팠고, 나중엔 걷기조차 힘들었다. 뜨겁고 습한 날씨, 쉬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하는 환경, 쉴 새 없이 말하고 통역해야 하는 나, 쿵쾅거리는 머리, 미슥거리는 속. 결국 나는 허름한 건물 안 쪽, 물조차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 가서 남몰래 토를 했다. 그리고 토악질하는 모습을 현지 스태프에게 들켜, 촬영 도중 모든 걸 내려놓고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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