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어 절로 지고 잎은 피어 만발할 적에 관객은 꽃들이 오만 송이는 되는 듯하구나!”
파리 루이비통 미술관 앞 아끌라마따시옹 공원. 어인 일인지 낯선 땅에서 신명 나는 남사당패 가락이 울려 퍼지고 있다. 희고 붉고 푸른 풍악을 휘날리는 남사당패 바로 앞에는 가위처럼 교차된 굵은 대나무 두 쌍이 흰 밧줄 하나를 팽팽하게 걸고 서 있다. 밧줄의 양 끝은 완만하게 경사져 초록의 잔디밭까지 이어져 있다. 어느새 위아래로 흰 한복 차림을 한 여인이 나타나 기울어진 밧줄 위로 두툼한 흰 버선을 신은 채 한 발 또 한 발 내디뎌 오르기 시작한다. 옴폭 파인 발바닥과 줄이 맞닿는 삼 센티미터 남짓의 경계. 그 좁은 경계에 온 체중이 실렸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 양옆으로 펼친 두 팔, 한쪽 손에 들린 흰 부채는 살랑살랑 그러나 단호하게 균형을 맞춘다. 대나무의 교차지점 꼭대기까지 오른 여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줄 아래 구경꾼들을 바라본다.
넓고 푸르게 펼쳐진 잔디밭에는 들꽃만큼이나 다양한 색과 표정의 얼굴들이 여인을 향하고 있다. 본격적인 줄판이 시작되고, 잔디밭 위 꽃들의 환호성은 줄 타는 여인을 넘어 푸른 하늘로 뻗는다.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에 남사당패의 풍악이 속도를 더해가면 삼 미터 허공에 걸린 줄 위 여인의 발걸음도 함께 내달린다. 아찔아찔 구경꾼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곡예가 이어지는 동안 여인은 분명히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시퍼렇게 벼려져 다음 순간 디뎌야 할 줄 위 한 지점만을 바라본다. 아슬아슬 온몸에 날 선 긴장감이 감돌지만 줄을 벗어나는 찰나 느껴지는 비상의 희열. 이 순간을 위해 사는 걸까 싶은 묘한 의문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 마리 새가 된다면 이 자유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텐데 하는 덧없는 아쉬움도 찰나를 스친다. 높이 비상했을 때 탁하고 멈춰지는 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마음. 그건 사는 건가, 죽는 건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맛보는 편각(片刻)의 희열. 외줄을 튕겨 허공의 무대로 날아오르면 그곳에 찰나와 겁(劫)이 공존한다.
어느새 가빠진 숨을 내쉬며 화면을 응시하는 나를 느낀다. 탈칵. 왁자하던 풍물소리는 클릭 한 번으로 소리를 잃었다. 어두운 방 안 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 앞에 앉은 나는 오래전 흘려야 했을 눈물을 뒤늦게 거두고 있다. 하염없는 끄덕끄덕. 이제야 조금 알겠다는 듯한 고갯짓.
새하얀 창에 ‘줄타기’를 검색하고 느리게 스크롤되는 화면을 응시하는 투명한 각막 위로 아마도 끝이 없을 문장들이 넘쳐흐른다. 흘러내리는 문장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린 듯 멍한 두 눈의 초점은 어딘가 다른 곳에 붙잡혀 있다. 푸른 허공을 가르는 줄 위에서 뾰족하게 들려있던 하얀 버선코, 호랑이라도 삼킨 듯 ‘번쩍’하고 빛나던 여인의 두 눈. 전생도 후생도 믿지 않는 나지만 만에 하나 전생이 있다면 내가 바로 그였을 것 같은 기묘한 기시감. 아슬아슬 아찔아찔 줄타기 같은 인생이 내 것뿐이겠냐만은, 나는 나라서, 나밖에 살아보질 못해서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살아야 했던 내가 너무나 안쓰럽다.
심장 한편을 간질이는 허공에 마음을 빼앗겼던 시절. 어느 때보다 뜨거워야 했을 20대의 내 심장은 이미 다 산 사람의 것처럼 타고 남은 재들로 매캐했다. 죽지 못해 살던 내 생의 한복판으로 예고 없이 찾아오곤 하던 기이한 충동들을 기억한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멀리서 다가오는 열차의 불빛을 바라볼 때, 달리는 차 안에서 문득 문을 열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그것은 파괴적인 욕망이라기보다 차라리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치명적인 유혹에 가까웠다. 높은 건물 난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를 상상하며 느끼던 그 저릿한 감각. 금방이라도 삶이란 줄에서 발을 떼어 허공으로 몸을 던지고 싶게 만들던, 그 죽음의 유혹은 사실 가장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그러나 차마 내지를 수 없었던 비명의 다른 얼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에서 계속...
*줄타기 명인 김대균의 영상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5ZK6l-q-B7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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