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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대리님'

이대리는 본캐인가 부캐인가

by LBR
대리님!


홍보일을 시작했던 첫 회사부터 지금 현재까지. 일주일이 7일이고 그중 8할을 차지하는 주 5일. 그러니까 현실 속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제2의 이름 '대리님'으로 살았다. 그 해 겨울, 회사 AE 친구들 둘과 벌였던 홈파티에서 우연히 같이 보게 됐던 넷플릭스 드라마 '나홀로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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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아주 살짝만 설명하자면 한 안경회사 '홍보팀 대리' 소연과 냉철한 개발자 난도, 그가 자기 얼굴이랑 똑같이 만들어 낸 홀로그램이자 다정하고 완벽한 인공지능 비서(이러기 있냐 진짜) 홀로가 만나 벌어지는 에피소드. 영화 HER가 생각나기도 하는 이 드라마는 '사랑할수록 외로워지는 불완전한 로맨스를 그렸다'라고 공식 홈에서 소개하고 있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말로만 듣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배우 고성희가 연기하는 여주인공이 '홍보팀 대리'라는 사실. 눈 앞의 치킨을 열심히 뜯으며 테슬라와의 페어링에 연신 감탄하고 있는데 AE 친구 한 명이 잊고 있던 사실을 인지 시켜주었다.



홍보팀 대리래요.
대 리 님 !


훗 그러니.jpg
...... 훗, 그러니?
채널 돌려!



짧고 굵게 나의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으나 물 대리인 내 말을 아무도 듣지 않았고, 우리는 그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홍보팀 한 대리'와 잘생긴 사이버 비서 '홀로'와의 달달하고도 안타까운 썸을 감상해야만 했다. 무려... 정동길의 그 브런치 카페가 등장하는 순간, 젓가락에 매달려 있던 떡볶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늘 지나다니는 그 길, 그 집. 장소만 예뻤지 가성비 별로라고 해서 지나만 다니던 그 집 앞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한 대리를, 잘생긴 홀로가 달래준다. 한대리의 직장도 정동길 어드매인가 보다. 그런데 그녀는 일도 하나도 안 하고 문제의 그 카페 앞에서 맨날 썸만 타고 있다. 내 일 가져가라, 한대리. 드라마 속 여주에게 괜히 심통을 부려본다. 다시 떡볶이에 집중하면서. 그 뒤로 점심 산책을 할 때마다, 동료들과 그 브런치 카페 앞을 지나갈 때면 약속이나 한 듯 들려오는 아름다운 합창.



1585046517934.jpg 한대리님, 일은 언제 할 겁니까



홍보팀 한대리는 정동길서
일도 안 하고 연애만 하고~
우리 이대리님은? 크크크
일 만 하 고!




문득 요즘 화두의 키워드가 떠올랐다. '본캐와 부캐'. 유행에 최고 민감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고로 더뎌서 늘 정체성의 혼란과 더불어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나는 언제나 그렇듯 초록창을 띄워 익숙치 않은 신식 용어를 타이핑하고 엔터를 누른다. 무려 검색창이라는 무료 서비스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본캐 : 원래부터 키우는 캐릭 (원래 본인의 게임 캐릭터)
부캐 : 필요에 의해서 키우는 캐릭 (보조, 서브 캐릭터)


원래부터 존재하던 게임 용어였으나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이미 톱스타인 그 들 (유재석, 이효리, 비)이 뭉쳐 만들었다는 그룹 '싹쓰리'가 '부캐의 세계'라는 주제로 방송을 하며 화제가 된 키워드였다. 게임이라고는 왕년에 이름을 떨쳤던(?!) 넷마블 알까기와 핑크 맞고 밖에 모르는 나에게 저 용어는 신세계였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부캐의 의미는 원래 직업이 아닌 제2의 직업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칭하는 용어로써 현실 속의 나를 게임 캐릭터로 놓고 상위 자아인 나를 플레이어로 보는 시각이었다. 흥미롭군.


이대리는 내 본캐인가 부캐인가.


본캐라고 보기에 이대리는 웃어도 마냥 웃는 것이 아닌,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고통 속의 사회적 자아인 것만 같고. 부캐라고 보기에는 현실 속 8할을 그 이대리로 살고 있었다. 야근의 상징인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고 싶지 않아 매일 오후 5시에 긴장이 최고로 치솟는, 매주 화요일 주간 회의 직전까지 긴장으로 손에 땀을 쥐는, 매일 아침 오늘은 어느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사서 쿠폰 도장을 찍을까 고민하는. 나의 본캐이자 부캐였던 '이대리'.


내가 이런 생각을 하건 말건, 코로나가 오건 말건 그 봄의 정동길엔 벚꽃이 피고 지고 초록 잎사귀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여름에는 말도 안 되게 길어지고 있는 폭염 속의 장마가 찾아와 매일 같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그 해 여름 손님을 보내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운 단풍의 빛깔로 물들어 있겠지. 같은 길인데도 그 길은 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점심의 그 길은 그렇게도 슬프게 생겼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에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냥 아련 아련한 얼굴로 그 예쁜 길을 걷다가 바쁜 걸음을 재촉해 총총거리며 들어가곤 했다. 퇴근길의 그 길은 그렇게도 화사해져 있었다. 세상 너그러워진 이대리의 발걸음은 해가 길어져 밝아진 저녁, 수줍은 듯 떠 있는 하얀 달과 초록 초록한 나무를 보며 최고의 텐션으로 차올랐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퇴근 송도 세상 밝아진다. 그 날 그 날 달라지는 이대리의 퇴근 송은 미드 '위기의 주부들'에서 나오는 메리의 내레이션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 날의 감정 상태를 말해주는 나만의 내레이션!


생각해보면 그 곳에서 맞이한 나의 하루하루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에피소드로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현실 같지 않았다. 누군가의 짜인 각본이라 여겨질 정도. 부디 드라마처럼 반전도 있어주고 나름 끝내주는 역전극도 존재해 주길 바랐던 하루하루. 이왕이면 내 게임판에 대박 내줄 고퀄 렙업 역전극이었으면 바라는 마음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매 시즌에 시즌을 거듭하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내 인생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처럼 타이틀만 바뀌며 현재 진행형인 내 인생. 그 속에서 키워지는 나의 본캐와 부캐! 이번 시즌의 타이틀은 '이대리 통신'이다. 이번 시즌은 부디 로맨틱 코미디로 달달하게 마무리될 수 있길 바라본다. 본캐인들 어떠하고 부캐인들 어떠하랴. 그 둘 다 '나'인걸? 언제나 본캐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현명한 부캐를 잘 키워보자 다짐해 본다. 그 시절 어정쩡한 직급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아팠고 나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그 이름,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그 이름.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인생 부캐!



대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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