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로해주는 것들
트로트와 일기장과 생판 모르는 사람과 신묘장구대다라니.
얼마 전 아이가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잠든 밤, 안방에서 엄마랑 TV를 봤다. 엄마는 트로트 예능을 좋아하신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힐링되는 것 같고 같은 방송을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아도 즐겁다고 하셨다. 우리 집 꼬마는 더 꼬마 시절부터 트로트 예능을 보시는 할머니 곁에서 흥겹게 춤을 추면서 자라고 있다. 예전에도 엄마는 트로트 예능을 보면서 웃기도 하시고 울기도 하셨는데 요즘은 엄마의 마음을 노래에 기대어 웃으시고, 노래에 실어 엄마의 슬픔을 흘려보내시기도 한다. 때로는 흥겹고 때로는 구슬픈 노래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 담겨있으나 꺼내어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대신 드러내 준다. 그래서 나도 요즘은 트로트 노래에 내 마음을 자주 기대곤 한다.
위로가 필요하더라도 그 누구도 만나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 이유는 이 감정을 진심으로 공감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도 주변에 형제자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남일이었다. 그저 형식적인 몇 마디 말만 전했을 뿐이었고 그 뒤로 깨끗이 잊었다. 동생을 잃고 그때 남일처럼 여겼던 일이 내 일이 되고 나니 그때 몇 마디 말로 지나쳤던 그들의 슬픔이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그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내 일이 되기 전까지는 남 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친한 친구에게도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나의 슬픔에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고민할 그들에게 고민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다. 나의 슬픔을 죄다 꺼내어 펼쳐 보이는데 드는 시간을 그들에게 내어달라고 할 수가 없다. 내 친구들이 이걸 알면 혹시라도 기분 나빠 할 수도 있겠다. 넌 나를 그렇게 밖에 안 봤냐고. 안다. 지금 생각나는 누군가는 내게 섭섭해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하지만 나는 나의 슬픔을 온전히 마주해줄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안다. 바로 우리 엄마다.
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싶은 날이면 글을 쓴다. 내 일기장에다 쓰기도 하고, 이 브런치에다 쓰기도 한다. 브런치는 문장이 어느 정도는 말이 되게끔 쓰려고 썼다 지웠다 하기도 하는데, 일기장은 아무 제약 없이 정말 마구마구 쓴다. 내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지 쓴다. 바깥으로부터의 위로가 필요할 때는 책을 읽는다. 나는 이 책 저 책 내가 가는 곳곳마다 한 권씩 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편이라 가장 많을 때는 14권의 책을 여기저기에 흩뿌려 두었다. 소설도 있고, 역사, 미술, 우주, 자기 계발 등등 다양하게도 벌려놓은 그 14권을 동생 장례식이 끝나고 집 청소를 하면서 전부 책꽂이에 갖다 꽂았다. 전부 읽기 싫어졌다. '저게 다 무슨 소용이야'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 한 달 정도 책은 한 장도 읽지 않았다. 어딜 가나 책을 이고 지고 다니던 나의 일상에서 책이라는 존재가 삭제되었다.
내 사정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오히려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아직 슬프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살아가는 모습 중 하나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슬프기도 하고 내 삶을 살고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둘 다 섞여있기도 하다. 매일매일 변하고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 내가 빠져 죽지 않으려면 일단 좀 혼자 있고 싶다. 그게 제일 바라는 바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친구들이 내게 시간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내가 알고 친구들이 알기에 만나면 서로의 감정을 살피고 때로는 맞춰주어야 하는 모든 상황은 '언젠가'로 밀어두었다. 그런데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냥 대화. 소통. 이야기. 말하고 듣기.
그즈음 아이의 어린이집 단짝 친구의 엄마와 친해지게 되었는데 주말에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함께 놀리면서 그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엄마의 삶에 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사정을 모르는 아이 친구 엄마 앞에서 정말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동생 장례식 이후 직장에서는 가면을 쓰고 웃으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날 아이 친구 엄마랑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냥 대화.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보지 않고, 걱정시키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날 이후 아이 친구 엄마와는 언니 동생으로 지내게 되었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그렇게 큰 위로가 되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글을 쓰고 나서 후련해지고, 생판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웃으면서 위로를 받았던 시간을 보낸 후 엄마가 생각났다. 글을 쓰지도 않고, 누구 만나는 사람 한 명 없이 식구들 전부 각자의 장소로 떠나고 나면 홀로 집에 남아있는 우리 엄마. 엄마는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 트로트 노래 몇 곡을 함께 듣고 나서 엄마에게 조용히 말했다.
"엄마, 엄마는 요즘 어떻게 버티고 있어?"
내 질문에 트로트 노래를 들으면서 웃고 있던 엄마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잦아들고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는 것이 보였다. 엄마는 두 손으로 가슴 부위에 큰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가슴에 그 동그라미처럼 큰 것이 항상 들어앉아있다고 하셨다. 한 순간도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 없다고 하셨다. 매일 새벽 세 시쯤 잠에서 깨면 동생 생각을 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 새벽에는 주로 동생이 떠나기 몇 달 전 엄마한테 전화해서 자금 흐름이 부족해서 힘들다고 말했던 날을 생각한다고 하셨다. 오래 힘들었으면서도 혼자 삭히고 별다른 내색도 없었던 아이의 마음. 그때 동생을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 동생의 마음과 엄마의 죄책감을 이야기하시면서 엄마가 우셨다. 나도 울었다. 그리고 낮에 운동을 나가시면 엄마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마음속으로 외신다고 했다. 언제나 동생이 마음속에 가득한데 어떤 날 그 어떤 마음의 대화로도 당신의 슬픔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미안함이 달래지지 않는 날은 살려달라는 심정으로 암송하신다고 했다. 온 정신을 거기에 집중하고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리면서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에 맺힌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드는 느낌이 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동생을 생각하면서 미안하다고,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너를 기리고 너를 사랑하고 너의 몫까지 살겠노라고. 그리고 이 생이 끝나고 나면 다시 만나자고 말하면서 마음에서 동생의 손을 잡고 안아준다고 하셨다.
엄마는 그렇게 버티고 계셨다. 자식을 떠나보낸 엄마는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있었다. 절대 이대로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그렇게 하고 계셨다. 이 슬픔의 파도에 무너져 휩쓸려버릴 것 같은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저기 위에 계신 분들께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늘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지만 엄마는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미안해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또 살아가려고 애쓰고 계셨다. 내게 일기장이 있다면 엄마에게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내가 힘들 땐 글을 쓰고, 내가 이런 일을 겪었는지 아예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웃었고, 동생이 너무 보고 싶고, 슬프고 우울한 어떤 날은 시간이 빨리 흐르고 흘러서 몇십 년이 후딱 흘러가 버려서 나도 이 생을 빨리 살다 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는 것까지. 하지만 엄마. 그 생각을 바라보는 거야.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생각을 달래지 못하고,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동생을 살리는 심정으로 나를 살릴 거야. 내가 이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엄마밖에 없어. 엄마 아프니까 걱정할까 봐 엄마랑 제일 많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한 마디도 못했어. 엄마 힘들 때 슬플 때 나한테 이야기해.
엄마는 알겠다고 했다. 또 힘들 때는 언제든지 엄마한테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웃었다. 다시 트로트 노래를 몇 곡 더 같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