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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되지 못한 한 줄 시

by 보리아빠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거기 나오는 비현실적인 외모의 주인공 사인방은, 소위 'F4(Flower 4)'라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어요. 이후 이 단어는 외모가 출중한 남자 네 명을 일컫는 말로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방영보다도 오래전에

우리나라 문학계에 F4가 있었습니다.


바로 백석, 임화, 황순원,

그리고... 윤동주 님까지.




올해는 광복 80주년입니다. 그리고 윤동주 님의 80주기이기도 하지요. 1945년 2월 16일, 27세 나이로 광복을 6개월 남기고 하늘의 별이 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분입니다. 112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꾸준히 사랑받고 있지요.


그런 윤동주 님을 기리고, 그분이 남긴 아름다운 흔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의미 있는 행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바로 시민 3,180명이 그분의 저서를 한 줄씩 읽어 독서 릴레이 기록을 기네스북에 등재하는 것이지요. 현재는 간디 자서전을 3,071명이 낭독한 기록이 올라가 있다고 합니다.


전 이 행사 소식에 손이 떨렸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전문을 외웠던 시도 서시(序詩)이고,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지금도 항상 가지고 다닐 정도로 윤동주 님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 단 한 문장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기네스 기록을 경신하면 물론 좋겠지만,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인이 사랑하는 윤동주를 넘어,

전 세계가 사랑하는 윤동주를 위해서요.


그래 서울 야외도서관 홈페이지에 회원 가입을 하고, 참가 신청을 했습니다. 윤동주 님이 사랑하는 별의 시간을 골라서요. 비록 낭독하게 될 문장을 제가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평소에 좋아하던 문장 몇 개 골라 연습도 했어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 쉽게 씌어진 시, 1942.06.03.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1939.09. -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 참회록, 1942.01.24. -


하지만 이땐 알지 못했습니다. 주최 측의 마음과, 참가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다는 걸요.



저는 결국, 기네스북 경신을 위해 제 목소리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광화문으로 가는 전철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렇지만 문자만으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미 기네스 기록 경신이 된 건지, 아니면 생각보다 참여 인원이 적어 도전에 실패한 건지 분명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전, 일단은 직접 가보기로 하고 서울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요.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철수 작업이 꽤 진행되었더라고요. 그래서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낭독자 간 공백이 10초를 넘으면 도전이 취소되는 규정 때문에 현장에서 참여한 사람의 비중이 높아 예약 시간이 늦은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고, 그래서 예정된 3,180명 보다 352명이 많은 3,532명으로 기네스 도전은 성료되었다네요.


전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윤동주 님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문을 다 읽었는지, 아니면 기록 경신이 된 시점에 행사를 끝낼 준비를 했던 건지 말이에요. 주최측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걸 알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습니다.


어쨌든간에 제가 원했던, '전 세계가 사랑하는 윤동주'는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성패와 상관 없이 제가 뭔갈 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어요.



남은 건 미리 인쇄된 참여 인증서뿐이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서성이다, 의미 없는 사진만 몇 장 남기고 돌아오는 전철을 탔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이 참 멀게 느껴졌어요. 다행인 건 주최 측의 운영 미숙을 탓하는 마음이 그리 오래 남아있진 않았다는 겁니다. 그저, 그분들이 추구했던 것과 제 생각이 달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치는 기네스 도전 성공이었을 테고, 제 가치는 그것과 그저 윤동주 님을 위해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이었지요. 같은 곳을 보고 있지만, 걸음의 속도가 다른... 미묘한 차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집으로 오는 전철에서, 어째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간극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약 참가자의 항의를 수도 없이 받았을 담당자의 사색이 된 얼굴에 서운함을 표현하기 미안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결과는 좋았고, 이미 행사는 끝났거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이 가벼워졌고, 한강을 건너는 중 우연히 본 불꽃이 남은 응어리마저 터뜨려 주었습니다.


밤은 참 셀 수 없이 많기도 하지만,

오늘 밤은 유달리 더 많아 보입니다.



이제 한 가지 바람이 생겼습니다. 혹시라도 10년 뒤에 비슷한 행사가 준비된다면, 그때는 가족과 다 같이 참여해 보려고요. 어쩌면 독서 릴레이 행사를 또 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기네스 기록을 뺏긴 인도가 그냥 두고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또 한 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일찌감치 참여를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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