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명이 두레학교에서 새음학교로 변경되었습니다.
새음 학교 지원서를 다운 받아서 쭈욱 읽어보았다. 그리고 난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추억의 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나 안해!"
한 때는 "나 안해"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던 시기가 있었다. 클로징 멘트로는 최강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이승복 어린이를 소리 질러 부르던 웅변학원을 다니기 싫어, 저 강력한 클로징 멘트로 그만두었고, 자장면 값까지 걸려있는 당구 내기에서 분명 세트 스코어 2대 1로 이겼는데, 부득부득 5판 3승제로 치자는 친구의 주장도 저 멘트로 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나이,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원서를 보자마자 숨죽여 있던 어린 시절의 내가 튀어나와 버렸다.
다운받은 문서 첫 페이지에 입학원서가 나왔다. 일반적인 이력서 양식이었다. 이 정도는 한쪽 눈 감고 왼손으로도 작성이 가능했다. 그다음 학부모 질문지가 나왔다. 유의사항만 한 페이지였다. 질문을 몇 개 할 건데 유의사항만 한 페이지지? '기술한 부분이 사실여부와 다를 경우, 입학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문구도 있었다. 흠, 그럼 내 직업을 NASA 우주연구원이나 FBI 비밀요원이라고 적지 않아야겠군.
그리고 나온 학부모 질문지. 예상을 깨고 질문이 엄청나게 많았다.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 정도만 물을지 알았는데 아니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라고 생각하는 순간 뒷페이지가 나타났고, 그 뒷페이지, 또 그 뒷페이지. 어린이 소개서에 포함되어야 할 내용까지 포함하면 총 25개 정도의 질문이 있었다. 더 괴로운 것은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예를 들면 '키? 몸무게? 생년월일? 출신 유치원?' 등은 하나도 없고, 하나하나 깊게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것 들이었다. 그래서 첫 페이지를 읽을 땐 "나 안 해"가 나왔다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선 그 멘트보다 더 어린 시절에 즐겨 쓰던 본능적인 외침까지 나와버렸다.
"안해 안해 안해 안해 안해"
난 가지는 않았지만 해외 MBA를 준비하며 지원서를 쓸 때 "why mba? Why this school? Tell me your current job? What's your goal?"등 밑도 끝도 없는 질문들에 800~1000자씩 써 내려가던 경험이 있다.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쓰는 건 아주 오글거리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지원서야 어차피 읽는 사람이 미국 사람일 테고, 그들에겐 괜히 겸손하게 글을 쓸 필요도 없어서 겸손기 쫘악 빼고 적당히 나를 1.3배 뻥튀기해서 글을 썼다. 내가 봐도 지원서 속의 1.3 버전 손창우는 정말 훌륭한 30세 젊은이였다. 하지만 이번 지원서는 가장 정직해야 할 우리 아이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읽는 분들이 기독교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아닌가.
그래서 나의 대답은 깔끔했다. "안해 안해 안해 안해 안해"
그랬더니 와이프는 예상했다는 듯이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쓸게"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다.
1. 가정에서 자녀의 신앙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2. 언제 자녀를 새음학교에 보내겠다고 결심하셨고 지원 이유는?
3. 새음학교 교육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내용은?
4. 자녀에게 엄격하게 훈육할 때는 언제이고 훈육 방법은?
5. 미디어에 대한 부모님의 입장은?
6. 자녀가 새음학교에서 어떠한 사람으로 자라나길 기대하는지?
그리고 <자녀 소개서>를 별도로 작성해야 하는데, 거기 포함되어야 할 내용들이 만만치 않았다. '자녀의 유치원 생활, 언어발달과 신체 발달 과정 중 특이했던 부분, 식생활 습관, 가정에서의 습관,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 자녀의 장단점, 자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고 도움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 등을 A4 3페이지 정도 써야 했던 것 같다. 그것도 폰트 10으로. 대학교 레포트를 낼 때 폰트에 대한 기준만 주어질 경우, 얍실하게 장평이나 줄 간격을 넓히는 신공으로 분량을 늘리곤 했는데, 이제 그럴 나이 아니었다. 그리고 와이프가 쓰는데 뭘.
와이프는 차분하게 지원서의 질문들을 채워 나갔다. 난 너무 무임승차하는 것 같아서 중간에 읽어보려 했으나, 가뜩이나 어려운 글쓰기를 누가 중간 검수를 한다고 하면 더 써지지 않을 듯해서 간섭하지 않았다. 믿어달라, 중간이라도 내가 받아서 이어 쓰고 싶었으나, 글의 톤 앤 매너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괜히 와이프가 쓴 부분에 꼰대처럼 빨간펜 짓을 할까 봐,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무관심한 척하며 관여를 안 했을 뿐이다.
그렇게 지우의 일생이 오롯이 담긴 지원서를 접수하고 나니, 더 "안해 안해 안해"하고 싶은 면접이 기다렸다. 심지어 아이 면접과 부모 면접이 따로 있었다. 우선 아이들은 하루 종일 선생님들과 같이 논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충분히 오랜 시간 함께 놀면서 관찰하기 때문에, 말만 예쁘게 잘한다고 붙을 수 있는 면접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이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을 관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2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두레 학교다 보니, 아이가 공동체 속에서 잘 적응해나갈 수 있는지와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등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부모 면접. 원래 면접과 같은 자리에선 절대 떨지 않는 스타일인데, 새음 학교 면접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내가 지원서 작성을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솔직히 난 그때까지도 교회 문화가 많이 낯설었다. 특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언어들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난 결혼과 동시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전엔 학교에서 채플 시간이 있었지만, 주로 자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었고, 예배란 것을 드려본 적이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2007년 3월부터 두레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같은 초심자가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들이 교회의 용어들이다. 예를 들면, "찬송가 88장을 다 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 "찬송가 88장을 다 같이 노래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난 찬양이란 단어를 교회 밖에선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다. 또한 "하나님이 제게 주신 달란트"라고 하지, "하나님이 제게 주신 탤런트"라고 하지 않는다. 당회장, 노회, 치리와 같은 생소한 단어들도 워낙 많아서, '치리'가 사람인지 사물인지 의결기구인지 명사인지 부사인지 도대체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가장 어려운 것이 기도였다. 기도도 뭔가 템플릿이 있고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겐 너무 어려웠다. 예를 들어, 오늘 같은 하루를 마감할 땐 교회에선 대략 이렇게 기도를 할 것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을 저희에게 허락해주시고, 따사로운 햇살로 우리를 어루만져주시는 주님의 손길 감사드립니다. 이 좋은 계절에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온 가족이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 홀로 받으시고, 두레 학교의 구성원들 모든 가정 가정 위에 일터 일터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길 기원드리옵나이다. 아멘."
난 '은혜로우신, 어루만져주시는, 천지를 주관하시는, 찬양하게, 이 영광 홀로 받으시고' 등등과 같은 표현을 Listening은 되는데 Speaking은 전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교회 용어들이 어색하던 당시 난 마음속으로 이런 식으로 편하게 기도했다. 사실 지금도 이런 식이다.
"하나님, 오늘 미세먼지 한 없는 맑은 날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공기청정기를 거금 들여 두 개를 샀는데, 그날 이후 하나님이 위에서 큰 공기청정기를 돌려버리시니 제가 켤 일이 없어졌어요. 살짝 억울하지만 그래도 좋은 날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두레 가족들도 우리처럼 즐거운 하루 보냈길 바랍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려요, 아멘"
난 교회에서 만난 분들 중 후자처럼 기도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려웠다.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하였지만, 난 전자와 같은 교회 언어 및 방식이 아니라, 후자와 같이 내가 편한 용어들로 기도를 하곤 했다. 그래서 지원서를 쓸 때나 면접에 들어갈 때, 혹시 교회에 맞지 않은 프리스타일 표현을 함으로써, 부끄러움은 온전히 와이프의 몫이 되어버리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나한테 기도만 시키지 마세요"하는 마음으로 면접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세 분이 앉아 계셨다. 그런데 세 분 다 정말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우릴 보자마자 눈이 보이지 않으실 만큼 환하게 웃으셨다. 다행히 중간에 앉아계신 선생님께서 기도를 해주셨다. 아멘. 그리고 본격적인 면접에 들어갔다.
대부분은 와이프가 대답했다. 와이프는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교회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탤런트와 달란트도 헷갈리지 않았다. 난 옆에서 흐뭇하게 아나운서 미소를 짓고 앉아 있었다. 불량스럽게 쩍벌로 앉아 있거나 심드렁한 표정은 결코 아니었고, 방청객처럼 선생님들과 와이프의 대화를 재미있게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게도 질문이 몇 개가 날아왔다. 난 무슨 배짱인지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가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아이를 언제 새음학교에 보내겠다고 결심했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아, 저는 솔직히 새음학교를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처음엔 사립도 생각하다가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서 집 앞 일반학교를 생각 중이었는데, 와이프가 새음학교를 보내자고 했어요. 그래서 현재 저의 정확한 스탠스는 와이프가 보내자고 하면 반대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흠...... 와이프와 장모님이 새음 학교를 강하게 원하고 계세요. 전 솔직히 지금도 대안 학교에 대해, 그리고 새음 학교에 대해 잘 몰라서, 보내야 하는지 확신이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육아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많이 안다고 해도, 애 셋을 키우신 장모님만큼 많이 알겠습니까? 그런데 장모님의 육아 실력은 손수 키우신 자식 세 명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와이프, 처제, 처남, 이런 말하긴 이상하지만, 참 잘 큰 것 같아요. 이렇게 자식 세 명을 모두 훌륭하게 키우신 장모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리고 전 와이프의 판단 역시 무한 신뢰합니다. 지금껏 살아보니 순간적인 기분에 함부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구요. 그리고 항상 나보단 더 깊이 생각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해오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서 전 와이프가 여러 학교들을 비교한 후 새음 학교로 결심을 했다면, 무조건 따를 생각입니다. 전 제 판단을 믿지 않고, 와이프와 장모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제 대답이, 아빠로서 너무 무책임한가요?"
대략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또한 가장 민감할 수 있는 나의 신앙심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였다.
"전 결혼한 이후 교회를 8년째 다니고 있지만, 아직 교회 문화가 많이 어색합니다. 예배는 매주 드리고 있지만 조금 겉돌고 있습니다. 솔직히 아직 신앙심이 깊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우가 새음 학교에 다니게 되면, 나 역시 새음 공동체에서 함께 성장하고 믿음이 깊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 한 분이 말씀하셨다.
"지우가 새음학교 입학하게 되면, 지우 아버님이 왠지 큰 일을 하실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그렇게 40~50분간의 면접이 끝났다. 나나 와이프나 선생님들에게 조금 더 잘 보이기 위한 꾸밈이 전혀 없었던 진솔한 면접이었다. 마무리 기도를 해주실 땐 진심으로 아멘 소리가 나왔다. 대단한 변화였다. 난 지금까지 립싱크 아멘만 했었지, 진심에서 우러나와 육성으로 와이프보다 큰 소리로 아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참 신기했다. 기독교 대안학교 면접에서, 난 새음학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신앙심도 깊지 않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으면서도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니.
나와서 지우에게도 면접 어땠냐고 물어보니, 재미있었다고 했다. 체육선생님과 공놀이도 했고, 사진을 보여주셔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지우는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미" 한 단어면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 셋이 면접을 끝내고 교회를 나오는데,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부딪쳐 인상이 살짝 구겨졌는데, 그때 찡그린 얼굴 모습은 기분 좋은 하회탈 같았으리라.
그렇게 지원서 작성과 면접을 끝냈고, 며칠 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독교 대안 학교? 이거 실화임?"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드디어 실화가 되어 버렸다.
(사족) 선생님이 면접 말미에서 하신 말씀이 가끔 숙제처럼 떠올라, 내가 새음 학교를 위해 큰 일을 해서 그 선생님의 혜안을 증명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는데, 일단 작은 일부터 하자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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