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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권력

의지대로 볼 수 있는 힘

by 열정적인 콤플렉스

한국 사회에서 '시선'이 갖는 상직적 의미는 '어디서 감히.. 눈을 그렇게 뜨고', '어디서 빤히..'라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만나는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시선을 보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빤히 쳐다보다.'는 멍 때리는 것에 가까울 때도 있다. 아직 스스로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뇌 정지상태에서 나오는 시선이다. 갑자기 사랑에 빠질 때, 생각지 못했던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런 시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빤히 쳐다보는 것과 불손한 째려봄과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이는 그 시선을 받는 사람을 어이없게 만들거나 공격이라고 느끼게 할 수 있다. 특히, 두 사람이 나이, 직급, 선후배 관계처럼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어디서 눈을 그렇게 뜨고..'라는 반응이 나오고 극적 재미를 위해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이어지며 시선과 서열 관계, 시선과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시선을 자신의 의지대로 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본인이 서열관계에서 가장 상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경우라면 더욱 극명하게 관계를 드러낸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높은 단을 만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나머지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도 그렇다. 절대로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을 잘 볼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의 차원이 아니다. 잘 볼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아니라 시선이 모이게 만들고, 자신은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일 뿐이다. 잘못을 해서 혼이 날 때 고개를 숙인다. 역시 시선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감히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파놉티콘의 감옥에서 감시자는 언제든 수용자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지만, 수용자는 감시자가 어디에 있는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시대 분위기가 바뀌면서 많이 달라졌지만 사무실의 구조 배치도 전형적인 시선의 자유로움을 직급이 높은 사람에게 허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상급자는 뒷자리에서 나머지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정면을 향한 채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보고 싶을 때 보고, 보고 싶은 상황이나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명확하다. 드라마적인 재미가 가미되어 과장된 요소가 많을 수 있지만,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힐긋거리거나 몸을 숨긴 채 얼굴의 반만 내놓고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이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시선이 권력임을 보여주는 정점은 도시 이곳저곳에, 그리고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CCTV다.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고 사회질서 유지와 범죄 예방, 사후 처리에 큰 도움이 되는 존재지만, 결국 본질은 자유로운 시선을 통한 감시다. 내가 어디를 지나서, 누구를 만났으며, 무엇을 먹었는지도 CCTV는 모두 알고 있다. 상대가 사람이었다면 왜 쳐다보고, 따라오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CCTV는 절대적인 권력의 시선이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무디어졌지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 자발적으로 CCTV 설치를 해달라고 관공서에 민원을 넣고 있지만, 높은 곳에서 본인이 원할 때 볼 수 있는 무제한의 시선권력인 셈이다.



유교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오랜 시간 상급자와 눈을 마주하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거나 공격성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면접과 상급자와의 대화, 손윗사람과의 대화에서 정면으로 눈을 마주해야 할 때는 중요한 내용,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전달하고 싶을 때만 허용된다. 그 외에는 인중과 목 사이에 시선을 두는 것을 누구도 명문화한 규칙으로 정한 바가 없지만,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선을 계속 피하는 것은 싫어함을 드러내거나 자신감이 결여된 것으로 읽힌다. 시선이 권력일 수밖에 없는 것은 동물들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지나가면 나머지는 길을 열어주고 시선을 피한다. 용감하게 우두머리에게 도전했다 지는 순간에는 꼬리를 말고 고래를 숙이거나 몸 전체를 바닥에 대고 감히 승자를 쳐다보지 못함으로써 패배를 인정하고 서열과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신호를 보낸다. 진화를 거쳐 사회적 존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어떻게든 눈을 맞추려고 온갖 재롱을 어른이 떤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웃어주면 더없이 행복하다. 그 어린아이와는 갈등할 일이 없고, 무엇인가를 놓고 경쟁할 일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즉,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자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도 한 없이 눈을 맞추며 행복해한다. 더 오래 시선을 맞추며 더 사랑하려고 애쓴다.



시선이 사랑이 아니라 권력이 되면 폭력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시선에 굴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닌 사랑을 담아 상대를 볼 수 있다면 어린아이와 눈이 맞대며 느끼는 행복과 사랑하는 사람과 꿀 떨어지는 시선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국민 눈높이에서 현재 상황을 바라보겠다는 그분들의 말에는 이미 '나는 너희와 눈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정말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눈 높이를 같이 하며 볼 수 있다면, 높은 단과 CCTV는 불필요한 '물건'이 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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