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편한 사이의 기준
거절당할까 봐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범주의 한가운데 들어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우연하게 받아 든 이른 퇴근시간이나 어쩌다 보니 생긴 노는 날이면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기만 할 뿐 선뜻 밥 한 끼, 차 한잔 마시자는 전화나 카톡을 보내는 걸 머뭇거린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시간대에 일을 하다 보니 평상시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큰 것도 있고 성격이 그렇기도 하다. 한참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만지작 거리다 가방을 둘러메고는 집으로 올라와 하루를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과 열정은 넘치고 주머니가 가벼웠던 시절에는 언제, 어디서든 밥과 술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약속장소로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극 I성향이었음에도, 처음 보는 사람이 있어도 곧잘 안면을 트고 무리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어울렸다. 인생은 Give&Take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내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면 여기저기 불러 신세 진 것을 갚기도 했다. 연락을 받기도 쉽고, 하기도 쉬운 시절이었다. 앞뒤를 재고 손익 계산 없이 모두가 즐거웠고 굉장히 불편한 사람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거절'이란 단어 자체가 사전에 없던 시간들이었다. 당일 약속과 참석 여부를 묻는 것이 '실례'라는 인식이 생기는 나이가 되면서, 다른 사람 퇴근 이후의 시간을 일하는 삶이 길어지면서 과거에 비해 주머니는 채워졌지만 시간과 열정이 없어져갔다. 밤 12시를 넘긴 시간에도 새로운 사람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추가되고 오고 가는 말과 술잔이 길어져도 다음 날 별다른 지장 없이 하루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길어지고 술잔이 스치기만 해도 다음 날이 부담스러워진다. 그렇게 거절당하는 것이 걱정스러워져 갔다.
어느 날 퇴근하기 전 차 안에 앉아 누구와 밥을 먹자고 연락을 해볼까 궁리를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고민을 할까? 밥을 먹자고 이야기를 해볼 마음이 들 정도면 '친한 사이'일 텐데, 친하다면 편히 전화를 할 수 있고, 그리고 친하다면 편히 상황을 이야기하고 '거절'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기에 왜 거절이란 것이 아직 현실이 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걱정부터 하는가? 내가 전화번호를 검색해 놓은 이 사람에게 저녁을 먹잔 이야기를 하고 사정상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이 사람은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나는 상처를 받을 것인가? 정말 어쩌다 연락을 받았거나 업무상 만나는 것이 '반강제적인 상황'에 놓인 관계가 아니라면 거절의 용이함이 정말 친한 사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친하니 현재 본인의 여건과 상황을 쉽게 이야기하고, 다음에 또 만날 기회나 가능성이 아주 높으니 지금의 거절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반복적으로, 무작위적으로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하는 것이 옳은 선택과 행동이라는 말은 아니다. 밥벌이도 있고 가장 우선순위에 놓인 가족도 있다. 그러니, 사전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 그렇더라도 의도치 않게 생긴 시간에 보고 싶은 친구나 사람이 있다면,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거절을 겁내하지 말고 통화버튼이나 카톡, DM을 보내면 된다. 그래야 상대도 우연하게 얻은 여유 시간에 커피 한잔 하자고 전화를 할 수 있다. 친함은 그 사람이 생각난다고 해서 유지되고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전화를 걸고, 연락을 해야 한다. 설사 얼굴을 대면하지는 못하더라도 목소리를 직접 듣고 손가락으로 보내는 사소하고 시더분한 말이라도 오고가야 정이 된다.
거절은 어색한 사이가 아니라 친한 사이의 징표가 된다. 그리고 거절은 다음 번에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고 다시 만나게 하는 사소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