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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없는 사회

물어볼 자유

by 열정적인 콤플렉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성이나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에게 나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고 혼자서 일정한 경지 혹은 남들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지적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과정도 결국은 '질문'이다. 그 질문의 대상이 나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는 것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배움에서 왜 질문을 해야 하는지, 질문이 중요성에 대한 내용은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질문이 중심이 되는 교육방식도 오랜 기간 활용되어 왔고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그런데, 왜 묻지 않을까?


어린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뭐든 신기하다. 그래서 '왜?'라는 말이 한시도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다. 엄마, 아빠의 지식의 한계뿐 아니라 인내심의 한계도 극한으로 테스트한다. 왜 하늘은 파란지, 단풍님은 왜 붉었는지, 할머니는 왜 흰색 머리카락이 있는지 궁금하다. 궁금하니 묻는 것이고, 물으니 세상을 하나씩 배워가는 것이다. 그럼 나이가 들어가면 배울 만큼 배워서, 그래서 궁금한 것이 없어져서 묻지 않는 걸까? 그럴 수는 없다. 세상은 언제나 모르는 것투성이고, 궁금한 것투성이다. 그렇지만 대충 아는 것도 생겼고 모르는 것은 그냥 넘어가도 무난하게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이 파란 이유를 물리 시간에 대충 배우긴 했지만,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파란 하늘을 보며 미세먼지가 없음에 감사하고 올려다보는 김에 목 운동, 허리 운동 한번 하면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긴 하다.



진짜로 왜 묻지 않을까?


한국 사회는 '왜?'라는 말을 포용하는 데 인색하다. 심지어 '왜?"라는 질문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경쟁의 대상이라고 도무지 여길 수 없는 작고 귀여운 꼬마 아이가 묻는 '왜?'는 그저 예쁘기만 하고 칭찬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왜?'라는 질문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핀잔을 듣기도 하다. '너는 하라는 것은 안 하고 왜 쓸데없는 데 관심을 두냐.'는 잔소리가 함께 따라오는 경우다. 그리고 일정한 사회 조직에 들어가 구성원의 일부로 살아가다 보면 당연히 '서열'이라는 것이 생긴다. 윗사람, 상급자가 하는 말에 '왜?'라고 묻는다면 상급자는 도전받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저 Yes맨이 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분위기, 서열 중시 문화 속에서 점차 질문을 하고, '왜?'라고 묻는 일은 극히 조심스럽고 드문 일이 되어간다. 그리고, 질문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지 않는다. '이거 나만 모르는 거야?'라는 뻘쯤 함과 당혹스러움이 싫어 아는 척하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척'하며 넘어가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고, 자신의 업무와 직업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불이익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질문의 포용성과도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질문을 칭찬하기는커녕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당연히 부족하거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어서 망신당하기보다는 그냥 어물쩍 넘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




聞くは一時の恥、聞かぬは一生の恥(きくはいっときのはじ、きかぬはいっしょうのはじ)

- 묻는 것은 잠깐의 수치, 묻지 않는 것은 평생의 수치



일본 속담이다. 묻는 수간이 부끄러움은 잠깐에 불과하지만, 모른 체 살아가는 평생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묻지 않는 자를 탓하는 의미로 읽힌다. 묻지 않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맞다. 배움의 의지가 있고, 궁금한 것을 해결하고자 하려는 뜻이 있다면 물어야 한다. 하지만, 질문에 인색한 문화도 함께 변해야만 한다. 물음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면박을 주거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질문하려는 의지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한마디로 질문에 인색한 사회에서 후덕한 인심을 보여주는 사회로 변해야 한다. 다양성의 존중이 세상 여기저기에서 주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질문도 그 다양성의 범주에 넣고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배움이 늘고, 현재에 안주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는 용기가 생기게 된다.



묻는 것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인식, 질문을 하면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을 스스로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주변의 분위기가 약점이고 부족한 부분이라고 여긴다면 용기를 내기보다는 그냥 '척'하면서 살아가는 게 편하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배우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다. 호기심은 머릿속에서만 머물면 실현될 수 없다. 말과 글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그 호기심에 누군가가 답을 주어야만 그다음 호기심과 질문이 생기는 선순환이 생긴다.



묻지 않는 배움을, 묻지 않고 배우려는 자를 탓하기 전에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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