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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비교'

불행과 행복의 시작

by 열정적인 콤플렉스

세상은 온통 우리에게 비교하지 말라고 말한다. 비교하지 않음으로써 행복해지고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수많은 책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를 강요당하고 비교하면서 산다. 오롯하게 자신에게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성인군자이거나 오랜 수련을 통해 도가 하늘에 닿은 사람, 그것도 아니면 오직 신만이 가능하다. 아쉽게 우리는 그저 난대로 살아가야 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 우리에게 비교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배고픔을 참고 살아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1등을 가리는 스포츠 경주만이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승차감이 아니라 하차감으로 타고, 하차감을 상징하는 독일 브랜드 자동차는 하차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로고를 더 크게 만들어서 자동차 가운데 떡하니 박아 넣었다. 이젠 개나 소나 다 타는 차가 되니 '강남 소나타'는 그 윗급으로 올라가며 비교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옷에 붙는 상표는 최대한 가려지지 않을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옮기며 '최적의 자리'를 찾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전부 비교의 연장선상에 있다. 드라마 '글로리'에서 태어난 손주를 위해 명품 배냇저고리를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도우미를 내치면서 내뱉은 말도, 얼마짜리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지도 비교에 의해 서열에 정해지는 비정한 세상을 말한다. 비교는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를 따라다닌다. 사립유치원에 가고, 성적이 매겨지는 시기가 오면 누구 집 아들, 딸은 몇 등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유명한 전국단위 자사고나 영재고 입학하고 엄마 친구 딸은 의대를 갔고, 아빠 동기 아들은 서울대에 갔다는 말로 비교가 된다. 그 비교는 취업을 하고서도 끝나지 않고, 오랜만에 나간 동기 모임에서 누가 어떤 차에서 내리는지, 손목에는 어떤 시계가 채워져 있는지, 지갑 속 카드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살핀다. 지인이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한 다리 건너 아는 누군가가 건물을 샀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다. 하물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널리 통용될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얼마나 비교를 하고, 비교를 당하고 사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비교를 하지 말고 살라고 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사고구조다. 이성의 부분과 오랜 시간 네모난 교실에 갇혀 옳은 말만 적힌 교과서에서 배운 암기형 지식은 비교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지만, 본능은 그리고 경험은 우리에게 비교의 경주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벼락부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벼락 거지는 면해야만 최소한의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교과서가 아닌 매정한 현실이 알려주는 뼛속 깊이 새겨지는 교훈은 우리에게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듣고 자라온 비교하지 말라는 말은 비교를 통해 자존감이 낮아지고 열등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있다. '경쟁은 제품에서는 위대한 것이지만, 사람에게서는 최악을 낳는다.'(데이비드 사르노프) 혹은 '인생이란, 희생자보다는 가해자가 되려는 경쟁에 불과하다.'(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경쟁이 우리를 얼마나 냉정하고 비참하게 만드는지 말해 준다. 경쟁에서 뒤처지도 도태된 자는 최악이 되고 희생자가 될 뿐이다. 당연히 패배의식, 열등감,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피터 티엘은 '경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경쟁을 중단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현실성이 동떨어지지만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경쟁이 없는 곳을 찾을 수도 없고, 경쟁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길러지고 교육받았다.


그러니 우리는 경쟁이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친구의 별 판 자동차가 부러우면 자기 계발에 힘쓰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PC방에서 게임을 하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인가 공부를 하고 성적이 오르면 부러워 시기질투를 할 것이 아니라 나도 PC방을 멀리하고 휴대폰 사용시간을 조절하면서 '공부'라는 것을 통해 친구의 부러운 면을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걷거나 뛰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패배감에 젖어 비난하고 근거 없는 뒷말을 만들어 내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아니, 조금 더 냉정하게 그렇게 시간과 에너비,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경쟁이 위대하고 발전적이기 위해서는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고통스러운 경쟁이지만, 위대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위대한 경쟁이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위대한 결과라는 것은 어쩌면 나와 비교 선상에 있던 누군가, 나보다 앞서 있던 누군가를 나보다 아래 등급에 위치하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발전적일 수 없고 건설적일 수 없다. 더군다나 위대한 결과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느낀 열등감, 패배의식을 그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경쟁이 발전을 위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비단 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위, 아래는 있을지언정 언제든 그 위, 아래는 바뀔 수 있어야 하고, 그 바뀜을 패배가 아니라 다시 한번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는 사회. 패배자가 아니라 도전자의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가 있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구성원이 있을 때 이상적인 경쟁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앞에 붙은 '이상적'에 있다. 이상적... 그러니 이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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