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거름장치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저녁을 먹던 중 카톡을 확인하며 내 표정에 짜증이 묻어났나 보다. 선배가 앞에 놓인 감자탕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며 마뜩잖은 표정을 불쑥 질문을 던졌다.
"대출금이라도 밀렸냐?"
"왜 그러세요. 그나마 돈 못 벌어도 갚을 돈 없다는 거 하나 위안 삼고 사는데.."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냐?"
"어떤 표정인데요?"
"오메... 짜증 나고 귀찮아 죽것는거.."
"진짜요?"
"그래.."
"부고 문자예요."
'누가 돌아가셨길래?"
"형님도 아시는 oo형님이여."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큰일을 세 번 치렀잖아요. 그동안 한 번도 안 오셨거든요. 그런데 부고 문자가 왔네요."
"다른 사람이 전화기에 있는 연락처에 일괄 발송했겠지."
"........................"
"뭐가 고민인데..?."
"그냥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거죠?"
"oo이랑은 오가며 가끔 보지."
"네. 오가며 가끔 보죠."
"그래서 일 치르면서 부고 문자 보냈는데, 안 오셨더라고요."
"니 5만 원짜리 있냐?"
"갑자기요? 5만 원짜리는 왜? 여기 있습니다."
"이 5만 원 없으면 타격 있냐?"
"5만 원 벌려고 하면 큰돈이죠. 그런데, 타격이야... "
"그럼 5만 원만 들고 갔다 와."
"그리고 니 마지막 일 치를 때 그때도 안 오면 oo 이는 그냥 XXX니까 연락을 하지도 받지도 말고."
그 뒤로 나에게 5만 원은 인맥거름장치 역할을 한다. 어쩌다 보니 남들보다 애사를 빠르게 겪고 있어 갚아야 할 일이 더 많다. 내가 애사를 치르는 동안 오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여전히 인간관계를 맺고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애매하다.' 그냥 안 왔으니 가지 않아도 된다는 '인생사 Give&Take' 마음가짐으로 넘어가기에 애매한 상황. 그럴 때는 지갑에서 5만 원을 꺼내 들고 간다. 그때 저 사람은 나와의 관계가 애매해서 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 후로 관계가 돈독해졌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혹은 사정이 좋지 않았거나 다른 일이 있어 깜빡했을 수도 있는데, 그저 짐작으로 넘어가기에는 애매한 그렇고 그런 사이.
5만 원이면 불편하고 찜찜한 내 마음도 편해지고, 다음번 내 차례가 왔을 때 5만 원이라는 거름막을 통해 주변 사람을 걸러낼 수도 있으니 5만 원이 결코 아까운 돈은 아닌 셈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5만 원으로 진단한다는 것이 지극히 속물 같은 생각이지만, 불쑥 왜 안 왔느냐? 나를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않았느냐가 따지고 물어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어색한 사이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간결하고 경제적이다.
소원컨데, 앞으로는 부고 문자를 받으면 애도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 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출금 이자상환이 밀렸다는 문자라도 받은 것처럼 짜증만 한가득인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큰 일을 치를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5만 원은 훌륭한 거름장치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