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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속해 있나?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흡연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속성'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익숙한 것과 무리 짓고 그 무리 안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추구하려는 '속성' 역시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 본능적인 생존 DNA안에 새겨져 있는 피아의 구분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동굴에 살 때는 애초에 동굴 입구부터 피아를 구분할 수 있었고 비슷한 DNA를 공유한 존재만이 존재하는 곳이었으니 안전했다. 하지만, 평원으로 나가고 이동 거리가 길어지면서 먼 곳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도움이 될 사람인지 나를 해칠 사람인지를 빠르게 구분하고 도망갈 것인지 아니면 싸워 이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했다. 어느 동굴 출신인지를 당시만의 방법으로 묻고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방법으로 세대를 걸쳐 내려왔다.



평원을 주름잡고 살던 시절보다 우리의 이동거리는 비교불가한 수준으로 길어졌고 만나는 사람의 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투박한 무기를 들고 죽이고 뺏던 방식은 없어졌지만 피아의 구분이 중요했던 시절이 그렇지 않던 기간보다 훨씬 더 길어 우리 유전자 안에는 여전히 평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빠른 판단과 대처, 무리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던 것이 남아 있다.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익숙한 말투에 끌리고 내가 사는 도시 이름을 간판으로 건 가게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향하는 것도 본능에 끌리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피를 나눈 사람끼리는 혈연으로 뭉친다. 가족을 넘어 무슨 성씨, 무슨 파, 몇 대손까지 기억하며 족보라는 것을 만들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이 족보를 뒤지고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따지고 보면 '생판 남'인 검사를 집안사람이라는 이유와 금두꺼비를 무기로 자신과 최형배의 범죄혐의를 벗긴다. 왕정 시대에는 특정 성씨의 국가 통치, 고려 시대 최 씨 무인정권, 조선 시대 안동 김 씨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혈연 중심의 파워게임의 승자들인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혈연 중심의 '힘센 무리'의 지배방식이다. 몇 남지 않은 성씨 중심의 왕조의 존재가 혈연의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벌 오너의 경영이 이어지는 것도 혈연이다. 미국도 'oo가문'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혈연을 중심으로 막대한 힘을 공유하고 있다.



지역을 연결고리로 한 지연.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자라집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고 '향수'를 공유하기 위해 모이고 만들기 시작한 'oo향우회'가 대표적인 모습이다. 경제발전 초기 일자리를 위해, 고향에 있는 가족 부양을 위해 서울을 비롯한 고향 주변의 대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각박한 삶의 피로를 덜기 위해 만들어졌고, 고향에 기부를 하거나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이주 고향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에 편승하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고향 사람끼리 돕자는 순수한 의도는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이 되었고, 고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진입장벽이자 차별이 되는 셈이다.



혈연과 지연을 떠나 '파워 엘리트'를 형성하기 시작한 학연. 학연을 향유할 인원수가 많아지면서 그 안에서도 혈연과 지연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특정 고등학교, 대학교, 거기에 특정 대학, 특정 학과 졸업생들 중심의 엘리트 집단이 형성된다. '어느 학교 나왔어?', '우리는 oo인 아니냐~.'라는 한 마디는 쉽게 동질감을 만들고 동질감을 넘어서 '한 편'이라는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블라인드 채용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력서에 한 줄 적인 'oo고 졸업, oo대학 oo학과 학사졸업, oo 대학 석사 수료'는 본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지만, 학연의 시작점이 된다.



이제는 우스개 소리로 담배를 함께 피우면서 이루어지는 '정치'의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로 '흡연'을 추가하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에서 '살아남으려면 옥상에서 담배를 같이 펴야 하나?'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분명히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시작한 것이니 존재 이유와 가치가 크다. 거의 모든 문명사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니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지만,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접촉의 빈도수, 이동거리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점차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불필요한 차별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의 확장이 같은 마을 사람, 같은 지역 사람으로 확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타인에 대한 배척과 불이익을 주는 것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글을 쓰며 스스로를 뒤집어 본다. 앞에서 언급한 것에 대해 고고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초월해서 사는 것처럼 적었지만, 나 역시 지역 향우회를 나가고 동기 모임, 동창회를 나간다. 남들보다 덜 하다고 것으로 위안해 보지만, 몇 회냐고 묻고 누구 아냐고 쉽게 말한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유독 학교 선배에게는 조심스럽게 대하고 신경을 썼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 그래도 이를 빌미로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고 다시금 변명의 기초를 쌓아 올려 보지만,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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