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자그마치 6년의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내게는 큰 의미가 있다. 회사의 시작과 함께 입사해 같이 커온 입장이라 내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대표는 아니지만 회사에서도 내 노고를 잊지 않았을 거야.’
“두 번째 공지가 올라왔어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안 좋으니 또 다른 개소리로 무마하려는 거겠지.”
그간의 일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외침에 정신을 차려 다음 공지사항을 눌러본다.
[안녕하세요 임직원 여러분.
금년도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 회사 구조의 일부 인력에 대한 조정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조치는 미래를 준비하고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의 비전과 미션을 더욱 강화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입니다.]
‘이게 뭐야..’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글을 읽었다.
[우리는 이러한 조치들이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중요한 단계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번 희망퇴직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임직원의 협력과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지금의 변경사항이 미래의 더 큰 성공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희망퇴직? 뭐.. 희망퇴직이라고? 통보처럼 얘기 꺼내놓고선 희망퇴직?’
거짓말 같이 아까 올라왔던 공지는 지워져 있었다. 그리고 말을 바꿔서 뉴스나 인터넷에서만 보던 희망퇴직자를 모집하고 있다. 구체적인 조건도 달려있지 않고 그저 양해의 말을 구한다는 형식적인 글이다. 아무래도 곧 공지의 효력이 불어닥칠 게 뻔하다. 아까 공지에 적혀 있던 조건이 문제가 되는 건지 이번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우와! 이 새끼들 공문 올린 꼬락서니 봐.”
“으아아악!”
회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가 하나하나 느껴지며 어지러워진다. 그때 다시 팀장과 부서장이 나타나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켜보려 한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진정이 될만한 소리를 해야 진정이 되죠. 근데 지금 이 결정 부서장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무슨 소리예요! 나도 지금 알았는데.”
“근데 억울하지 않으세요? 너무 침착하신데요.”
“흠흠.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는 법인데 뭘 호들갑을 떨어요.”
“호들갑? 와.. 호들갑이라고? 웃기고 있네. 당신은 안전하다 이거야?”
“회사에 일하러 왔지 지금 싸우러 왔습니까? 돈 받으면 돈 값을 해야 할 거 아니요. 뭐 하나 꼬투리만 잡히면 그거 가지고 늘어지면서 어떻게든 공짜로 돈 벌 생각이나 하고. 그러니까 희망퇴직 대상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 아니야! 평소에 잘했어야지.”
“희망퇴직은 말 그대로 나갈 사람 지원받는 건데 그 말은 지금 내가 잘린다는 것처럼 들리네?”
“아니.. 그건.”
진정시키려고 나타난 부서장은 입씨름에 휘말려 본전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회사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각색이었다. 화가 나서 소리 지르는 사람, 그대로 바깥으로 담배 피우러 나가는 무리, 자리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넋 놓고 있는 나 같은 사람. 모두가 피해자처럼 보일 뿐이다. 내가 바친 6년의 시간 따위는 쓰레기 같은 거였구나. 다닌 시간만 가지고 회사에 어필할 수 있는 건 없을 거 같았다. 어차피 50% 이상 자르는 건 변함없는 거 아닐까? 분명 아까 봤던 내용대로 진행되겠지. 그나저나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이직 준비를 해야 하나. 갑작스럽게 이직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자 다 포기하고 싶어 진다. 귀찮고 피곤하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없다. 다른 회사에서 먹힐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프. 바람이나 쐴래요?”
션이 다가와 말을 건다. 문득 점심 먹으며 제안했던 내용이 떠오르며 션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휴.. 그래요. 산책이나 할까요.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회사 주변을 걷기 시작한다.
“편의점 가서 음료수라도 살까요.”
“네 좋아요.”
산책할 때마다 들르던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수를 사서 밖으로 나온다. 한참을 걸어 공원에 위치한 벤치를 발견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벤치에 가서 앉는다.
“잘된 거 같아요.”
“네?”
짐작은 가지만 놀란 척해본다.
“오히려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되는 거 있죠? 차라리 잘됐어요. 저 이직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제프도 같이 가요.”
‘다시 말 꺼내줘서 고마워요.’
“회사의 결정에 있어서 우리 같은 직장인은 뭘까요.”
“먼지? 하하. 언제 회사가 우리 눈치 봤나요. 나가라면 나가고 불만 있어도 말도 못 하고 그런 거죠 뭐.”
“후.. 새로운 곳이라고 다를까요?”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챈 션이 다급하게 말을 한다.
“뭐 확신하면 안 되겠지만 거긴 좀 달라요. 대표님을 만나 보면 제프도 제 말 이해하겠지만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이거든요. 지금처럼 헌신짝처럼 버려질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요.”
“그런 곳이 있을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건 생각 안 하고 오로지 일만 생각하며 다닐 수 있는 회사면 더 바랄 게 없다.
“고민을 좀 더 해보긴 해야겠지만 저도 마음이 가네요. 지금 회사 하는 짓도 맘에 안 들고. 어떻게 버틴다고 해도 그다음은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잘 생각하셨어요. 제가 약속은 최대한 빨리 잡아볼게요.”
내 말을 듣고 션의 표정이 환해졌다. 과연 잘하는 행동일까? 하지만 달리 선택지도 없다. 이직하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귀찮은데 이것만큼 좋은 제안도 없으니. 다른 회사 알아보는 건 미루자. 그나저나 다시 갑갑한 회사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다시 가라앉기 시작한다. 팀 단톡방에 올라오는 메시지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쌓여 있는 메시지 수가 어마어마한 걸로 봐서는 다른 사람들도 불만이 쌓여 있는 걸로 보인다.
‘그만둘 때 두더라도 조건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마음은 그만둔다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알게 모르게 퇴직 조건이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 시작한다. 왠지 이런 식으로 회사를 포기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나겠지라는 생각을 하니 다시 한번 쓴웃음이 지어진다. 산책을 끝마치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제대로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미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서인가 팀장을 비롯해 부서장도 자리엔 없었다. 어딘가에 불려 가서 비상대책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간의 회사 생활에 젖어 있던 난 반항보다는 순응을 택하기로 했다. 딱히 불만을 드러내봤자 나중에 퇴사 조건만 나빠지지 않을까 괜스레 걱정도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찍혀서 좋을 건 없다. 갈 때 가더라도 최대한 챙길 거라도 잘 챙기자.
—
시간이 좀 지나자 회사 메신저에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대표인 조르디입니다. 회사를 매각하게 된 점에 대해 자세히 얘기를 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어떻게든 회사를 키워 온 제 입장에서 마무리를 이렇게 짓고 싶진 않았으나 최근 격변하는 경제 상황과 맞물려 투자 유치는 쉽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가치도 평가 절하되어 필요로 하는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도저히 없었고 그 와중에 유일하게 제안이 들어와 대의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코 제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점 알아주셨으면 좋겠고 아까 올라갔던 공지에 언급했던 퇴사율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조율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바라는 건 전 직원의 지금 처우 그대로의 승계를 희망하나 아시다시피 이상과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거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구체적인 퇴사율과 혹시라도 퇴사의 대상이 되는 분께 최대한 누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고 과정에 대한 공유를 하겠습니다. 부디 회사의 결정에 최대한 따라 주신다면 믿어 주신만큼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다시 얘기드리겠습니다. 대표로서의 제 역할은 이제 끝이 났지만 마지막 정리까지는 확실히 매듭짓고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회사의 미래는 결정되었다. 결국 아무리 좋게 포장해 봤자 다른 회사에 팔았다는 얘기일 뿐이다.
‘대의? 당장 월급이 안 나오면 생계 유지할 방법이 없는데. 대체 무슨 얼어 죽을 대의란 말이야! 그런 건 네가 해결할 문제잖아.’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저마다 욕을 지껄이기도 화를 내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울음이 터졌는지 흑흑 소리가 들릴 정도로 우는 사람도 있다. 결국 부품 중의 하나일 뿐이다. 부품으로써 버텨줘야 할 땐 그렇게 구슬리더니. 쓸모가 다하자 가차 없이 버리려고 한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 어느 누구도 보장해 줄 수 없다지만 회사에서 뒤통수를 치니 꼼짝없이 맞을 수밖에.
‘그래도 난 행운아야. 결정된 건 아니지만 이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
절망스러웠지만 한줄기 빛이 보여 마냥 마음이 무겁지는 않다. 션이 자리를 마련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동아줄을 움켜쥘 생각이다. 잘 보여야 한다. 무조건. 안되더라도 되게 해야 해. 그나저나 아내에겐 뭐라고 해야 하지. 요즘 들어 만나서 대화만 하면 싸우는 아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답답하다. 내 탓은 아니지만 오늘 이야기를 전하면 분명 안 좋은 소리를 할게 뻔하다.
‘후우..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기나 하려나.’
그래도 어쩌겠나. 설득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갈 곳이 없는 건 아니니 충분히 당당할 수 있다. 머리로는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야 하는 건지. 대한민국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거 참 힘들다. 오늘은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퇴근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싶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도 2시간이 남아 있다.
‘더럽게 안가네.’
조르디의 메시지는 결국 본인을 좋은 사람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직원들은 다들 욕하는 중이다. 그래도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조르디가 얘기한 대로 조건이라도 좋아지길 바라며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이 생기길 희망할 뿐이다. 그때 다시 또 전체 메시지가 올라왔다.
[내일 오전 10시 대회의실에서 타운홀 미팅을 할 예정이니 궁금하신 임직원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새로운 경영진과의 Q&A 시간이 될 것이며 앞으로의 회사 운영 방안 및 인력 조정 방안에 대한 언급이 있을 예정입니다.]
웅성웅성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답이 없는 웅성거림은 금방 힘을 잃고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