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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Jul 19. 2020

아이에게 져주는 아빠가 되려면

미안하다, 아빠가 이겨서

아이가 8살쯤 되니 아빠와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 주로 보드게임이다. 원카드, 다이아몬드, 부루마블, 장기, 체스 같은 것이다. 근래 들어서는 '포켓몬 카드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적에 봤던 초창기 포켓몬 애니메이션을 우연히 보여줬던 게 계기였다. 그때부터 매일 조금씩 정주행을 하며 포켓몬 세계에 빠져들다 카드게임도 사서 하게 됐다. 보아하니 한두 번 하고 말 것 같지 않다. 아빠와 몇 번 해보고 규칙을 터득하더니 시간 있을 때마다 카드를 들여다보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조합이 어쩌고, 리자몽이 저쩌고 하며 몰입 중이다.


나도 금세 요령을 터득해 함께 즐기고 있다. 옛날 생각도 나고 아이와 같은 게임을 하며 즐기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유치한 오기가 발동해버렸다. 아들 녀석이 아빠를 이기겠다고 좋은 카드를 선점해버린 탓이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카드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데 아이가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내용을 세세하게 살펴 선별했다. 아들에게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이었다. 아직 게임 내용 중에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 겉보기에 좋은 것만 선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아무튼 뭔가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모르는 사이 승부욕이 동했다. 게임에 흥이 오른 아이의 신소리를 들으면서부터다. 아빠가 너무 잘한다는 둥, 자신은 이기기 어려울 것 같지만 꼭 이길 것이라는 둥 군말이 많았다. 자신이 이기도록 도와달라는 아이의 말에 '게임은 공정하게 해야 재미있지'라고 말했다. 돌아보니 손이 오그라드는 변명이었다. 승부의 세계가 냉혹한 것을 알려주려던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엄격하게 굴었던지. 아빠 닮아 입담이 좋은 아이의 말에 괜히 반응하여 열성을 다해 게임에 임했다. 하필 그 판에서 아이의 카드가 불리해져 내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울상을 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뭘 굳이 이겼어요'라는 아내의 입모양에 '며칠간 계속 져줘서 괜찮아요'라고 말했지만 퍽 궁색했다. 역시 졌다며 못마땅해 한 아이는 화난 눈으로 아빠를 째려보다가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마음이 토라진 것이다. 뭘 그런 것으로 성을 내냐고 말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데... 쓸수록 초라해지는 걸 보니 그 게임의 결과는 정해진 것이 맞았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게임을 얼른 마치고 싶어 하는 아빠의 본능을 잠시 억누르고, 아이가 이길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그냥 지는 게 싫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손자한테 장기 알려주신다며 판을 여셨던 장인어른도 한사코 이기려고 하셔서 장모님께 핀잔받은 적이 있다. 혹시 '남자 동물'의 본성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여기에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게임하며 두뇌발달을 돕고 성취감을 갖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우선 흥미를 갖도록 이기는 경험이 필요했다. 그걸 도와야 할 아빠가 '그냥 져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라고 내심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승리는 얻었지만 아들의 관심은 잃을 수 있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다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기로 아내 앞에서 굳게 다짐할까 싶다. 분명 아빠로서 나이도 많고 생각도 성숙한 것 같다가도, 어느 때는 아이 같은 구석이 엿보인다. 이것을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라며 옹호했던 과거를 회개하련다. 분명 문제가 됐던 그 게임의 승패를 가르는 마지막 순간에, 아이를 도와야 할 자녀가 아니라 승부의 대상으로 봤었나 보다. 찰나지만. 내 생각과 마음만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 그저 영향을 받기만 할 뿐이다. 이게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니던가.


좀 더 어른답게
행동하고 싶어 졌습니다.
아이가 정말 잘 보고
반응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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