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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hat Oct 20. 2020

노후계획

"그 때 이곳으로 돌아와야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시골의 오래된 대문들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 양쪽으로 파-란 벼가 일렁이는 길을 따라가니 새로운 마을이 나왔다. 커다란 수호나무와 정자, 그리고 경로당. 어느 곳을 가도 가장 먼저 마주하는 ‘마을’의 얼굴이다. 바람이 정자를 지나고 있다. 하얗게 이끼가 낀 수호나무가 흔들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고, 그 아래 어느 할머니의 것일 유모차가 기대어 서 있다. 경로당에서 흘러나오는 어르신들의 노랫소리에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볼까 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오래도록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는지, 입구까지 이름 모를 풀들이 전부 차지해버린 집 한 채가 있었다.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시멘트 벽, 그 위를 뻗어나가는 담쟁이덩굴, 우편함에 꽂혀있는 편지봉투 하나, ‘도암신리길 54-1’. 한참을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나는 이곳이 좋다. 매일매일이 살아있는 것 같다. 벅찰 정도로 감사할 것이 많다. 그리고 빈 집이 많다. 색이 바래고 녹이 슨 대문, 주변을 가득 둘러싼 풀과 꽃, 고요. 아름답지만 쓸쓸하다. 자꾸만 눈길이 간다. 그곳을 따뜻함으로 채우고 싶다. 이다음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 줄어들 때가 온다면, 그 때 이곳으로 돌아와야지.

나는 이곳이 좋다.

 닭 울음소리에 눈을 뜨면 새벽공기 속에서 체조를 한다. 동이 트면 밭에 나가 일하다가 갓 따온 싱싱한 채소들로 아침식사를 한다. 태양빛이 뜨거워질 때, 나만의 바쁜 시간을 보낸다. 피아노를 치다 차를 마시다 책을 읽다 낮잠을 자다 그림을 그린다. 해가 조금 기울어 산책하기 좋은 시간이 오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낮은 담벼락이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골목길이 논을 가로지르는 둑길이 되고, 둑길이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댐길이 되고, 댐길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해안길이 된다. 그 길의 끝은 언제나 그렇듯 마을 정자로 이어진다. 선선한 저녁 바람에 커다란 마을나무가 나부끼고, 그 아래 정자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도란도란 저마다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갈 때, 아 배고프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저녁식사를 하고 하루를 돌아본다. 역시나 수고했고 멋진 하루였다. 풀벌레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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