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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Jul 31. 2023

5. 와인인 듯 커피인 듯(3)

    가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커피의 발가락을 물티슈로 대충 닦고는 마들렌 먹을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급하게 구는 이유는 마들렌에서 풍겨오는 예상치 못한 향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마들렌을 담은 봉지에 코를 박고 킁킁대보았지만 어째서인지 새큼한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을은 한껏 부풀어오른 궁금증을 안고 마들렌을 반으로 잘랐다. 반은 이대로 먹고 남은 절반은 오븐에 데워 먹어야지. 남은 마들렌을 오븐에 돌려놓고 손에 쥐고 있던 마들렌 한 입을 물었다.

    '오...'

    예상했던 맛이 아니었다. 가을은 새큼한 토마토에 톡 쏘는 박하향을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선드라이 토마토(말린 토마토)를 써서 새큼함을 줄였고, 생바질 대신 바질페스토를 써서 무게감을 더했다. 얼핏 피자를 먹는 것 같기도 했다. 빵을 뚫어져라 분석하던 중 오븐에서 알람이 울렸다. 가을은 다 데워진 빵을 꺼내 그릇에 옮겨 식기 전에 재빨리 베어 물었다. 풉.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거 완전, 마르게리따 피자를 디저트로 만든 맛이잖아! 마들렌 피자라니. 가을은 마들렌에서 피자 맛이 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 웃음은 가을에게 번뜩이는 자극을 주었다. 가을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이 빵의 아쉬운 점을 찾아보자. 무엇이지? 그래. 바로 퍽퍽한 식감이다. 말린 토마토와 바질을 넣느라 촉촉하고 부드러운 마들렌의 매력이 묻히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은 해결책.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까. 촉촉함을 살리기 위해서는 시럽이나 크림 같은 소스가 잘 어울릴텐데. 이 마들렌의 안쪽에 크림치즈를 넣는다면? 크리미한 크림치즈가 마들렌을 씹을수록 촉촉하게 감싸줄거야. 더욱 다채로운 맛을 낼 수 있겠지. 가을은 당장 빵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이름하여 토마토-바질-크림치즈-마들렌을.

    가을은 커피에게 명태 쪼가리를 물려 정신을 팔리게 한 후 집 근처 제일 큰 마트로 향했다. 기본적인 마들렌의 재료는 가지고 있었지만 선드라이토마토, 바질페스토, 그리고 크림치즈가 필요했다. 마트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급해졌고, 어느새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지하철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뛸 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마트에 도착해서는 10분 안에 결제를 마쳐야 한다는 직원의 엄포에 순식간에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재료를 찾아내었다. 목표를 향해 불같이 달려드는 가을의 묵혀둔 기질이 오랜만에 발휘된 순간이었다. 또다시 집으로 달려온 가을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오븐을 예열한 후 크림치즈를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자,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베이킹의 시간이다. 큰 그릇에 설탕과 버터를 넣고 휘핑기로 거품이 날 때까지 섞는다. 그다음으로는 계란과 밀가루, 약간의 이스트를 뭉치지 않게 섞어낸다. 마지막으로 바질페스토 한 스푼까지. 오랫동안 키워둔 감각을 발휘하여 재료들이 적당히 섞였음을 확인한다면 주걱을 꺼내 거품이 죽지 않게 휘저으면 된다. 이제 선드라이토마토를 잘게 자른다. 불쾌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식감을 가지려면 새끼손톱 절반 만 한 크기가 좋겠다. 그렇게 섞은 반죽은 냉장고 속에서 발효의 시간을 갖는다. 한시라도 빨리 완성작을 만들어내고 싶은 가을이지만 발효의 시간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빵이 충분히 부풀어야 통통한 배꼽을 가진 마들렌을 만들 수 있기 때문. 한 시간이 지나고 냉장고에서 꺼낸 반죽을 마들렌 팬에 3분의 1 가량 채워준다. 그리고는 냉동실에 잠시 넣어둔 크림치즈를 꺼내 마들렌 반죽의 중앙에 티스푼으로 한 스푼 씩 떠서 올려준다. 크림치즈를 덮을 만큼 반죽을 다시 채워주면 가을의 역할은 끝이다. 이제부터는 오븐의 영역이다. 예열된 오븐에 마들렌 팬을 넣고 15분 동안 기도하는 자세를 유지하며 빵이 익기를 기다린다. 종교도 없는 가을이 굳이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건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그녀의 고유한 버릇이었다. 점점 버터 냄새가 방 안에 퍼져나가더니 15분이 지났다는 알림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가을은 전기가 통한 듯 팔짝 뛰며 오븐에서 마들렌 팬을 꺼내 식탁 위에 두었다. 원래는 마들렌이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이 마들렌은 피자의 특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 정도는 따뜻할 때 먹어보기로 한다. 포크로 마들렌 하나를 집어 후-후 불고는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문다.

    "앗 뜨거-"

    그렇다. 너무 뜨겁다. 180도의 오븐 속에 15분을 있었던 마들렌은 고작 1분 만에 먹기 좋을 만큼 따뜻해질 수 없었다. 가을은 포크로 마들렌을 반토막 낸 후 그 안에 입김을 세 번 불고는 다시 입에 와앙 넣었다.

    "풋-"

    가을은 웃음이 나왔다. 마들렌이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맛을 선사했던 것이다. 바질의 향이 약해서 페스토를 한 스푼 더 넣어도 됐을 것 같긴 하지만, 충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들렌 안의 크림치즈가 씹을수록 꼬릿한 맛과 촉촉한 식감을 더해주었고, 삼킬 때 즈음에는 꾸덕함까지 선사하여 먹는 내내 특별한 풍미를 뽐내고 있었다. 마치 피자 같기도, 치즈케이크 같기도 한 오묘하고 풍부한 맛이었다. 입 안에서 마법이 일어난 듯 강렬한 여운이 남았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분명 근사한 요리였다. 방구석 파티시에 가을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1년 만에 느낀 이 어색한 성취감의 꽃 사이로는 찰나의 순간에 맺힌 원망의 열매가 구석구석 박혀있었다.

    '시간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가을의 머릿속에 결실을 놓친 아까운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을 버리지 않고 매일 베이킹을 했다면 훨씬 더 많은 근사한 빵을 만들었을 텐데.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일까.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어서 일어나라고 엉덩이를 걷어 차고 싶었다. 그렇게 착잡한 마음으로 앉아있던 가을은,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커피를 발견했다.

    "얼른 치우고,"

    '잠이나 자자.'

    가을은 착잡한 마음으로 어질러져있는 식탁부터 치우기로 했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급한 마음에 우왕좌왕 대며 설거지거리를 개수대에 담던 가을은 이스트가 담긴 통을 톡 하고 쳐버렸다.

    "앗-"

    이스트가 가을의 방에서 눈처럼 휘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하얗게 쏟아지는 이스트를 본 가을의 마음속으로 흩뿌려져 있던 과거의 기억이 날려 들어왔다. 중학교 1학년 여름. 처음 베이킹을 배우러 학원에 간, 식빵을 만드는 날이었다. 몸집도 작았던 가을이 온몸으로 반죽 치대기를 반복하니 등과 겨드랑이에서 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른 속이 부들거리고, 왼발이 저려왔지만 첫 수업의 열의를 가득 담아 반죽의 끈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해 낸 가을은 재빨리 식빵을 구워 완성작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학원 선생님은 애타는 가을의 마음도 모른 채 발효를 시켜야 한다며 학생들을 한 시간 동안이나 멍하니 기다리게 했다. 조급해하던 가을에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빵이 부풀도록 충분히 기다려 줘야 해요. 의미 없는 시간 같지만 풍미 있고 부드러운 빵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랍니다."

    이미 다 완성된 것만 같은 반죽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시간. 그동안 반죽은 온전한 빵이 되기 위해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그 속도는 너무나도 느려서 빤히 바라보면 달라진 것 없는 반죽덩어리 같지만 처음과 마지막은 그 크기가 확연히 다르다. 정지 혹은 멈춤의 시간 동안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은 틈새마다 자리를 채우고 있는 공기 혹은 공허의 역할이다. 그리고 가을은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마들렌을 구울 때도 부푸는 시간은 건드리지 않았으면서, 정작 자신이 부푸는 시간은 존중하지 못했다. 간과하고 있었다. 무심하게 아래로 깔보며 자신의 반죽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매일 밤이, 가위로 잘라낸 듯 파편화된 시간들이, 매일 저녁 비워낸 밥그릇처럼 텅 빈 순간들이, 사실은 공허함으로 가득 찬 무한한 가능성의 시간이었다. 가을은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온전한 행복을 쟁취한 것만 같았다.

    기다림의 시간, 보이지는 않지만, 가늠할 수 없지만, 분명히 부풀고 있다는 믿음의 시간, 그 시간을 허락해주는 것. 어떤 날은 유달리 많이 기다려야 할 날도 있겠지만, 그 모든 시간을 채우면 반가운 충만함이 있으리라 믿어 보는 것. 또 그 기다림 속에서도 펼쳐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행복을 만끽하는 것.

    그렇다면 오늘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반가운 충만함을 맞이하는 날이다.

    이 중심에는 커피 오마카세 사장이 있었다. 사실 가을은 빵이 맛있다고 느껴지자마자 제일 먼저 사장이 떠올랐다. 사장에게 빵을 선물하여 차오르는 행복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었다. 가을은 매일 저녁 방문하던 카페에 하루 아침에, 그것도 말도 없이 발을 끊었다. 죽은 듯 숨어있었다. 어쩌면 사장은 가을 자신에게 큰 사단이 났다고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려나? 그렇다면 사장은 이 빵을 들고 나타난 나를 보고 큰 충격을 받으시겠지. 오랜만에 찾아온 내게 어떤 커피를 선사해 줄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과연 이 빵을 맛있다고 인정해 줄까? 가을은 사장에게 줄 마들렌을 꼼꼼히 포장하고는 마음 가득 궁금증을 안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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