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보류 1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초름 Jul 31. 2023

5. 와인인 듯 커피인 듯(2)

    "강아지를 키우지 못하는 상황이시면 두고 가셔도 돼요. 주인을 잃고 길 위에 덩그러니 있던 아이를 데려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대표는 자신이 한 말로 인해 가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미안한 듯한 미소를 띠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을은 함께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손을 내민다면 이 강아지는 한 달 후에 죽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생명을 죽일 수 없다는 죄책감에 떠밀려 강아지를 키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아이는 여기에 남겨져 죽거나 나와 함께 불행한 삶을 살 것이다. 선택지는 불행한 죽음과, 어쩌면 더욱 불행해질 생존뿐이었다. 가을은 쉽사리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망설이던 가을은 결심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자. 집에 가서 생각하자.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가을은 수백 마리의 강아지를 보호하는 대표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공손히 인사한 후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기사는 강아지와 함께 탄 가을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가주세요."

    가을의 굳은 표정과 어두운 목소리에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을 시작했다. 가을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에게 예의 없이 대답한 것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도저히 참담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직도 이불속에 숨어 나오려고조차 않고 있다. 세상 밖이 무서운 걸까. 혹시라도 전 주인에게 큰 상처를 받았던 걸까. 아이는 이불 속에서 아직 잘 살아있다는 듯 손가락을 꿈틀거린다. 그 모습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으려는 듯 보여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웃음이 삐져나올 뻔 했다. 가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이불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겨있었지만, 겨우 두 시간은 그녀의 고민을 담기에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한 가을은 원룸 중앙에 강아지를 두고 조심스레 이불을 걷었다. 초롱한 눈망울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너무 귀엽고 불쌍해서 큰 한숨이 나왔다.

    "너 방금 어디로 팔려갈 뻔했는지 알아?"

    강아지는 입가에 맛있는 거라도 묻은 듯 혓바닥으로 입 주위를 핥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가을은 헐레벌떡 밥그릇에 사료와 물을 담아 강아지에게 건넸다. 강아지는 밥그릇의 물을 할짝거리더니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어제보다는 더 많이 먹는 듯했지만 역시 한주먹만큼도 먹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사료를 먹는 모습은 아기보다도 여린 모습이었다. 이 작은 생명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이다. 나처럼 무책임하고 사랑을 줄 줄 모르는 주인을 만나게 된다면,

    "넌 나랑 있으면 불행할 거야."

    길가에서 죽을뻔한 강아지를 무턱대고 데려와서는 밥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나는 주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가을은 어제 강아지를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박스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떨고 있었을까. 정말 옛 주인이 본인이 키우던 개가 낳은 새끼 강아지를 감당하기 싫어서 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그 사람을 당장이라도 잡아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벌을 주고 싶었다. 이렇게 초롱한 눈을 가진 아이를 소중히 보살펴주지는 못할망정 길 한복판에 버려버리다니. 또 이 강아지의 어미개는 얼마나 자식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자신의 주인이 자신의 자식을 버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평생 동안 자식을 그리워하며 살 어미개가 불쌍했다. 그래도 이 아이는 어미를 잃고서도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았다. 어려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세탁소 아저씨와 유기견 보호소 대표의 덕이 컸다. 세탁소 아저씨가 이불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강아지는 아무도 모르게 죽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기견 보호소 대표의 호소가 없었다면 자신은 강아지를 죄책감 없이 보호소에 맡겼을 것이고, 한 달 후 안락사를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의 따뜻함이 이 작은 아이를 살려낸 힘이 되었다. 가을은 마침내 해답이 떠올랐다. 정 없고 척박한 세상이지만, 이곳에도 분명히 세탁소 아저씨와 유기견 보호소 대표처럼 따뜻한 사람이 더 존재할 것이다. 강아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진정한 주인을 찾아야겠다.

    "내가 좋은 주인을 찾아줄게. 네 진정한 주인을 말이야."

    가을은 좋은 주인을 찾기 전까지 강아지를 임시 보호 하기로 했다.


    더 나은 주인을 찾을 때까지만 보살피기로 마음먹었지만 하루를 키우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은 상당했다. 콩알만큼 먹었어도 배출은 해야 할 테니 애견샵에 들러 배변패드를 샀고, 배변훈련도 열심히 시켰다. 다음 주인이 보다 편할 수 있도록. 언젠가 가을이 실수로 마시던 커피를 강아지 몸에 쏟았던 것인지 등에 커피자국이 나 있길래 강아지용 샴푸까지 샀다. 이후에 알았지만 그건 그 아이의 고유한 털 색이었다. 믹스견이라 털이 얼룩덜룩했던 것인데 가을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아이의 몸을 씻기고 또 씻겼었다. 남은 예방접종을 맞히기 위해 동물병원에 갔을 때, 믹스견이라 노랗게 얼룩이 진 것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미궁 속에 있던 커피 자국의 비밀을 풀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을은 강아지의 이름을 '커피'라고 지었다. 커피는 처음 가을을 본 일주일 정도는 낯을 가리는 듯 낑낑거리기만 하더니 곧 익숙해지고는 방구석 대장부의 모습을 보였다. 가을이 집에 들어오면 꼬리를 대차게 흔들어대며 그 작은 원룸을 100바퀴는 도는 듯했고, 피곤한 가을이 침대에 누우면 어깨를 계속 긁어대는 바람에 유튜브를 10분도 채 볼 수 없게 했. 한때는 회사 일로 지쳐있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커피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움직임도 많은 애가 하루종일 작은 집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어찌나 답답했을까 싶었던 가을은 커피를 안고 애견샵에 가서 목줄을 샀다. 커피는 목줄을 채워주자마자 발에 모터를 단 듯 동네 구경을 시작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주위에서 개만 보이면 그 작은놈이 가을을 지키겠다고 목을 번쩍 치켜들고 왕왕 짖어대기 일쑤였다. 덕분에 가을은 길가에 다른 개가 나타나면 잽싸게 커피를 안고 골목으로 숨기 바빴다. 그렇게 한 시간을 돌다 보면 커피는 예고 없이 지쳐서는 길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버리곤 했다. 그러면 가을은 커피를 들쳐 안고 집으로 가서 몸을 씻기고, 자신의 몸도 씻고서는 함께 잠에 들었다. 가을의 저녁은 새롭게 변화하고 있었다. 시간을 죽이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을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커피의 진정한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밤 인스타그램으로 커피의 주인을 찾는 글을 올렸다. 커피를 키워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가을처럼 홀로 사는 직장인이거나, 부모의 허락도 없이 무턱대고 연락한 초등학생이 전부였다. 가을은 커피의 행복을 위해 진정으로 신중을 가하고 있었다. 커피를 사랑하게 된 만큼 더욱더 좋은 사람에게 보내줄 것이다.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은 우리 사이를 위한 말이 아닐까.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커피의 밥을 챙겨주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은 후 산책에 나섰다. 새로운 길을 탐험하는 재미에 빠진 커피는 가을이 와보지도 않은 골목골목을 휩쓸고 다녔다. 그 순간이었다. 커피를 따라 터벅거리며 달리던 가을의 눈이 커피의 눈망울처럼 초롱하게 빛났다. 사실 눈보다 먼저 반응한 건 코였다. 가을을 행복하게 해주는 냄새가 코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고소하고 포근하면서도 꿉꿉한 버터의 냄새가 골목 가득 진동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어두운 건물 사이에서 홀로 불이 밝게 켜진 빵집이 있었다. 가을은 커피를 안아 들고서 빵집 앞으로 향했다. 마감 시간이 다 와가는지 진열대에는 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고개를 더 깊숙이 숙이니 주방이 보였다. 그 곳에서는 가을의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온몸을 사용해서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내일 선보일 빵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가을은 눈앞의 여성이 만든 빵을 먹어보고 싶다는 본능적 이끌림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커피와 함께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빵집에 들어갈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지. 가을은 커피를 크게 한 번 쓰다듬고는 용기를 내 외쳤다.

    "사장님!!"

    빵을 만들던 여성은 밖에서 뿜어져 나오는 큰 외침 소리에 서둘러 앞치마를 풀고는 문을 열었다. 그가 대꾸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막상 여성을 불러내니 반가운 마음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커져버렸다. 가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한데, 제가 빵을 사고 싶어서요. 그런데 강아지가 있어서... 들어가지를 못해서..."

    여성은 가을의 말을 듣고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혹시 어떤 빵이 드시고 싶으신가요? 카드 주시면 제가 포장해서 가지고 나올게요."

    가을은 문 너머로 진열된 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을 또한 빵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겉모습만 봐도 어떤 맛과 향을 띠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그런 가을의 시선을 사로잡는 하나의 빵이 있었다.

    '토마토-바질-마들렌'

    마들렌은 자고로 극강의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을 가진 스펀지케이크이다. 입안에서 녹아드는 식감을 유지하려면 보통 레몬파우더나 홍차, 초코가루 등의 부드러운 가루를 사용한다. 달콤함과 버터맛이 과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어야 해서 재료의 비율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반면 토마토와 바질은 입자가 부드럽지도 않고 고유의 강렬한 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토마토, 바질, 마들렌의 조합은 생소한 조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토마토의 상큼을 넘어선 새큼함, 껍질의 이물감, 게다가 바질의 까끌하고 톡 쏘는 박하향이 더해진 마들렌은 이상적인 마들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쉽사리 군침이 도는 디저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을은 더욱 궁금했다. 주위 다른 빵의 종류와 상태로 보아 꽤나 실력자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런 여성이 만드는 예상할 수 없는 빵의 맛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가을은 토마토-바질-마들렌을 가리켰고, 사장이 말했다.

    "토마토-바질-마들렌을 고르셨네요. 빵을 만드는 분이시죠?"

    빵을 고르는 가을을 지켜본 여성은 둘 사이에 무언가 통하는 느낌을 받은 듯했다.

이전 11화 5. 와인인 듯 커피인 듯(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