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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류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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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Jun 19. 2023

5. 와인인 듯 커피인 듯(1)

    '지루해.'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다른 한 손은 배꼽 위에 올려둔 채, 가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온통 까맣다. 휴대폰 조명에 그 빛을 빼앗긴 것이었다. 

    언제부터였지?

    제부터 나는 휴대폰만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기 시작한 걸까. 그저 소비로만 가득한 삶이다. 생산성이라는 단어는 옅어져 버린 채로, 도태되었다. 그래. 나는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 안을 텅 비워버린 것은 무엇인가. 삽인지 호미인지 모를 미궁의 도구가 내 안의 장기를 퍼다 허공에 부어버리고 있었다.

    취미가 있었다. 특히 빵 굽기를 좋아했다. 꽁꽁 얼어있던 버터가 녹기 시작하면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 오븐에서 빵을 꺼내자마자 강렬히 뜨거워지는 방 안의 공기, 늦은 밤에 조금씩 떼어먹는 포근하고 따뜻한 빵 조각, 다 식은 빵을 정성스레 포장하여 선물할 때의 뿌듯함까지. 일련의 과정들은 분명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행위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요즘 가을은 빵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빵을 만들고는 싶지만, 그 힘을 내기가 싫다는 말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할 때만 해도 열정이 차오른다. 오늘 저녁에는 정말 빵을 만들겠다며, 어떤 메뉴를 만들지까지 정해놓고서는 막상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다보면 자신 또한 회사에서 처리되어 집에 누워만 있고 싶은 마음이 뇌를 정복해 버린다. 그리하여 가을은 시간을 죽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퇴근길에 배달 어플로 떡볶이를 시키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찌든 몸을 씻어내기 위해 허물을 벗으며 화장실로 향한다. 샤워가 끝날 즈음 문 앞에 음식이 도착한다.

    '씻는 것도 귀찮아.'

    출근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일주일은 씻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냄새나는 직장인이 될 수는 없다. 냄새나는 사원으로 미움을 받을 수는 없으니. 아니, 미움을 '더' 받을 수는 없으니까. 가을은 머리를 대충 탈탈 털고는 문 앞에 놓인 떡볶이를 챙겨 식탁 겸 책상에 앉는다. 키보드를 대충 치우고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일회용품 그릇을 꺼내어 저녁을 먹기 시작한다. 고작 떡볶이 하나에 일회용품이 여섯 개나 된다. 뚜껑을 열다가 엄지 손가락에 묻은 떡볶이 소스를 쪽쪽 빨아대고는 마우스를 쥔다. 혼자 밥을 먹기에는 심심했던 가을에게 유튜브는 매일 저녁 밥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추천 영상 하나를 틀어놓고 저녁을 먹기 시작한다. 입으로는 떡을 씹고 있지만 눈을 화면을 벗어나지 않는다. 포크는 자신이 무엇을 집는지도 모르는 채 떡볶이 그릇을 퍽퍽 찌른다. 몇 번의 포크질만에 겨우 떡 하나가 걸린다. 가을은 집은 떡을 보지도 않은 채 입에 때려 넣는다. 자신이 먹은 게 떡인지 어묵인지도 모르는 듯 했다. 한참 동안 포크가 아무것도 찌르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그릇을 바라본다. 그 많은 양을 다 먹었군. 자신이 먹은 저녁 양을 인지하고나니 배가 터질 듯 불러온다. 가을은 그릇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배를 조물 거리며 영상을 이어서 본다. 지루하다. 마음속이 공허로 가득 차 있다. 아, 떡볶이. 마음속이 공허와 떡볶이로 가득하다.

    회사에서부터 하루종일 앉아있었던 가을은 어서 누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차올라 먹은 저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회용품 그릇에 묻은 양념을 물로 씻어내고는 이미 가득 차있는 분리수거 통에 쌓아둔다. 내일은 꼭 분리수거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눕는다. 지금부터는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시간을 죽이는 시간. 시간을 죽이는 시간이라니, 누군가는 금 같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지만 죽기 위해 태어난 시간도 존재한다. 가을은 하루종일 이 시간을 기다렸다. 어깨를 치고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 하면 할수록 쌓이는 업무, 매일을 봐도 불편한 동료 사이에서 그토록 기다린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아무도 문의 메일을 보내지 않는 이 시간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이불속에 몸을 더욱 파묻는다. 하지만 세 시간이 지났을까. 하염없이 유튜브를 보고 있자니 불쑥 불쾌한 자괴감이 문을 두드린다. 침대에 널브러져 눈알이 터질 듯 영상만 보는 자신이 창피해진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가을은 알찬 저녁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커피오마카세에서 선사하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집에 돌아와, 오늘의 빵을 굽고는, 예쁜 봉지에 담아 포장하고, 살짝 남겨둔 빵은 야식으로 야금거리다가, 버터 냄새를 맡으며 잠에 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무엇, 그 무엇도 하고 있지 않다. 누워서 배만 긁으며 유튜브를 보고 있다. 누군가는 이 영상을 선보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겠지. 그런데 나는 그만큼 치열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 그렇게 자괴감과 안락함 사이에서 새벽이 찾아온다. 7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당장 잠들어도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뻑뻑해진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유튜브에서 잠이 잘 오는 음악을 찾아 잠에 든다. 고작 네 시간 후에 울린 알람에 겨우 눈을 뜨지만 자는 사이 더욱 건조해진 눈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한 손을 눈물을 닦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유튜브를 켠다. 작은 원룸 안의 적막을 깨기 위해 무슨 내용인지 잘 들리지도 않는 영상을 틀어놓고 회사에 갈 준비를 한다.

    회사에 가는 길. 지하철에 서 있는 가을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굳어있다. 앉을자리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으면 배차 간격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앞의 한 남자는 자기 몸만 한 큰 백팩을 메고 와서는 가을의 명치를 쿡쿡 쑤셔대고 있었다. 가을이 억-하는 소리를 내었을 때도 그는 흘긋 쳐다보고 비웃을 뿐이었다. 마치 '네가 왜 내 앞에 그따위로 자리를 잡아서는 사서 고생을 하니' 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사람은 본디 악한 존재가 분명하다. 가을은 중학교 때 배운 성악설에 공감하며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꽉 찬 지하철을 함께 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의 인성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은 터질듯한 지하철이 분명할 테니까.

     지루해. 가을은 공허함을 참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핸드폰을 눈앞에 갖다 대었다. 아침에 보다 만 영상을 이어서 보기 시작한다. 핸드폰 요금을 아끼기 위해 데이터를 조금만 써야 하는 저렴한 요금제로 바꾸었기 때문에 집에서 미리 영상을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막상 튼 영상은, 이렇게 지겨울 수가! 결국 가을은 지하철 공용 와이파이를 연결하여 1분 안에 영상의 기승전결을 다 보여주는 유튜브 쇼츠를 보기 시작했다. 가을의 취향을 빠삭히 간파한 알고리즘에 빠지자 한 시간의 출근길이 10분처럼 느껴진다.

    앗, 공용 와이파이 연결이 끊긴다. 수많은 인파 때문이었다. 핸드폰 화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팔을 번쩍 들어 핸드폰을 든,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힌, 눈을 끔뻑거리는 모양새는 꽤나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왼쪽도, 오른쪽도, 앞 뒤 모두가 똑같이 유튜브 쇼츠를 보고 있었다. 모두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쥐고는 엄지손가락을 올려대며 1분의 영상도 버티지 못하고 10초 만에 넘겨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 중심에 있는 가을은 지극히 평범한 현대인일뿐이었다.

    9시에 딱 맞추어 도착한 가을은 한잔의 커피도 마시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다. 분명 입사 전에는 일이 별로 없는 회사라고 알고 있었는데 왜 우리 팀만 바쁜 건지. 옆 팀 사람들은 출근해서도 유튜브를 본다. 같은 월급을 받는다는 게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처럼 유튜브를 보며 일을 하고 싶었지만 여유를 부렸다가는 야근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을 삐쭉대고는 다시 집중모드로 들어선다. 결국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다. 며칠 전 바쁜 업무를 마치고 나면 뿌듯하지 않냐는 선배의 물음에 가을의 마음속 대답은 이러했다.

    '엑셀을 잘 쓰는 기계가 된 느낌이랄까요.'

    왜 아직 자신이 하는 단순작업을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가득해진다. 다행인 것 같기도. 이 일을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가을은 직장을 잃고 쫄쫄 굶으며 하루종일 유튜브만 봐야 할지도 모른다. 쳇바퀴 돌 듯 일하던 가을은 점심시간이 되자 팀원들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간다. 오전 내내 머리를 쥐어짜가며 일을 해서 그런지 갑자기 주어진 점심시간은 무료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면 점심을 먹기 위해 긴 줄을 서는 시간, 쌀을 입 안에 넣고 씹는 시간, 사무실로 돌아가는 시간, 양치를 하는 시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뭔가 공허한 기분이랄까. 그러니 엄지손가락은 자동 반사로 인스타그램을 켜게 된다. 인스타그램 속에는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간 친구들과 어젯밤 퇴근 후 술집이나 카페에서 만남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들이 부러운가? 아니, 부럽지 않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가을은 휴가를 잘 보낼 용기도, 퇴근 후 친구들을 만날 체력도 없었다. 하나 더, 가을은 안다. 인스타그램 속 이들의 일상도 유튜브로 가득 차있을 거라는 걸. 너희들도 지하철에서 엄지손가락만 굴려대는 현대인일뿐이잖아.

    퇴근 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 후-하-, 후-하, 가을은 격한 복식호흡을 선보이며 신호등을 건너고 있다. 6시 5분에는 출발해야 17분 지하철을 탈 수 있는데 무려 5분이나 늦게 출발한 것이었다. 세상이 가을에게 장난을 치듯 숨이 터질 때까지 달린 가을의 코 앞에서 지하철 문은 닫혀버렸다. 다시 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손을 문에 살포시 얹어보았지만 소용은 없었다. 매정한 기관사. 당신은 한 사람의 평화로운 저녁을 날려버렸다. 눈앞에서 떠나는 지하철 속 사람들을 보니 억울함이 차올랐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집을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가게 생겼잖아. 퇴근 직전에 일을 주는 팀장은 죽어 마땅하다며 입가에서 욕이 꾸물꺼리며 새어 나온다. 시간이라도 죽이자, 살인을 할 수는 없잖아? 가을은 다시 유튜브를 킨다.

    곧 너덜거리는 몸을 이끌고 지하철역에서 내린다. 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커피 오마카세가 있다. 이렇게 지치는 날이면 사장이 선사해 주는 커피가 더욱 간절해진다. 하지만 자신은 어제저녁도 누워있느라 빵을 굽지 못했다. 저 멀리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인다. 회사가 늦게 끝난다는 가을의 투정 때문에 한 시간이나 더 일을 하게 된 사장이다. 그런데 정작 그 손님은 카페에 발도 들이지 않고 있다.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팀장을 저주한 것처럼 사장은 나를 저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을은 오늘도 카페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배달음식을 먹고는 유튜브를 보다 새벽에 잠들었다.


    '짹-짹-'

    눈이 팍 하고 터졌다, 아니, 떠졌다. 알람이 울린 것도 아닌데 눈을 뜬 건 불길한 징조였다. 방 안에 햇살이 가득하다. 새소리가 들린다. 왠지 모를 평화. 그 안의 공포. 가을은 심장에서 울리는 쿵쾅거리는 알람 소리를 느끼며 빠르게 핸드폰을 켰다. 8시 30분. 지각이다. 어제 입었던 옷을 바닥에서 주워 입고, 어제 들었던 가방을 그대로 들고는 집을 뛰쳐 나선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어폰을 찾던 가을은 집 책상 위에 그것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제 충전한다고 꺼내놓고는 까먹고 챙기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지하철에서 필요 없는 소음을 들으며 멀뚱히 서있어야 한다니. 끔찍한 하루가 될 게 뻔했다. 우선 당장의 출근은 택시를 타기로 한다. 큰 거리로 나가서 택시를 잡으려던 가을은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롯데마트 마크가 그려진 박스 안에 숨어 있는 하얀, 어쩌면 누런, 어라? 작은 강아지였다. 주위를 둘러본다. 이 큰 번화가에 아무도 없다. 누군가 강아지를 박스 안에 넣어둔 건지, 아니면 햋빛에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이 뜨거워서 스스로 들어간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박스 안 강아지는 눈이부셔서 혹은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가을은 주인을 찾아줄 시간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가을은 박스와 그 안의 강아지를 들고는 바로 앞에 보이는 세탁소에 들어갔다.

    "저기요, 아저씨."

    바지를 다리고 있던 세탁소 아저씨가 가을과 강아지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예 아가씨. 뭔 일입니꺼."

    "정말 죄송한데, 이 강아지가 여기 세탁소 앞에 있었거든요. 주인이 강아지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혹시 여기서 이 강아지를 찾는 주인이 올 때까지만 세탁소 안에 놔주실 수 있으신가요?"

    자신이 생각해도 무례한 부탁을 드리는 것 같아 난감했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세탁소 아저씨는 당황스러운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잇! 딱 봐도 버려졌고마. 안 오면 어쩔라고예. 나는 야 책임 못져야이!"

    가을은 강아지가 담긴 박스를 다리미판 위에 올려두고는 손을 싹싹 빌며 말했다.

    "아저씨, 저녁때까지만요. 제가 저녁에 올게요. 자 여기 제 신분증이랑... 제 현금 10만 원도 맡기고 갈게요. 주인이 안 나타나면 제가 저녁에 꼭 와서 데리고 가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아저씨는 한숨을 푹 쉬더니 저녁에 오지 않으면 강아지를 길가에 버려버릴 거라고 강조하며 가을의 부탁을 승낙했다.


    퇴근 후, 주인이 나타났기를 바랐던 가을의 마음이 무색하게 세탁소에서는 상자 속 강아지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탁소 아저씨는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강아지가 하루 종일 떨었다며 작은 이불과 방석을 만들어 놓으셨다. 가을의 삶에서 보기 드문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었다. 아저씨께 감사 인사를 드린 가을은 강아지가 담긴 박스를 들고 동물병원에 향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요즘 강아지들은 몸 안에 칩을 넣어두기 때문에 그걸 확인하면 주인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강아지의 주인을 찾으러 왔다고 하자마자 수의사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수의사가 말했다.

    "이런 강아지는 보통 칩이 없어요.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된 아기고, 영양 섭취도 제대로 안 돼서 바싹 말라있잖아요. 예방접종도 맞지 않았을게 뻔하고... 한번 확인해 보긴 하겠지만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수의사의 예측은 정확했다. 당연히 칩은 없었고 예방 접종조차 맞지 않아 진드기와 벼룩으로 인한 피부병까지 있는 상태였다. 그가 덧붙여서 말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개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집 주인이 키울 여력이 안 되니까 몰래 빼내와서 버렸을 확률이 높아요. 이럴거면 중성화수술을 미리 시키든가 했어야지."

    세상에는 못된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러니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지가 않는 것이다. 가을은 안 그래도 떨어진 인류애가 바닥까지 치닫는 것을 느꼈다. 가을은 이 불쌍한 강아지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로서 몇 가지의 예방 접종과 피부병 치료를 받게한 후 집으로 향했다. 내일 유기견보호소에 갈 것이다. 자신은 고작 5평짜리 원룸에 살고 있다. 게다가 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직장인이다. 퇴근 후에 강아지를 돌봐줄 몸과 마음의 여유도 없다. 자신 같은 주인과 함께 사는 강아지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가을은 집에 들어가는 길목 편의점에서 사료를 샀다. 아직 아기라서 사료를 물에 불려 줘야 한다는 수의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한 가을은 자신이 먹는 밥그릇에 사료를 담고 물을 부어 박스 안에 가져다 두었다. 이불을 덮고 숨어있는 강아지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갓 태어난 아기 같았다. 조심히 이불을 걷고 사료를 가리켰다.

    "이거 먹어."

    가을은 자신이 뱉은 말에 픽-하며 냉소를 띠었다. 얘가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잖아. 어이없어. 강아지는 갑자기 밝아진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코를 킁킁대며 사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혓바닥을 내밀어 물을 마셔대더니 곧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니? 얼마나 먹는지 몰라서 사료 한 움큼을 집어왔는데 이 아이는 고작 열 알 정도를 먹고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몸이 작아서 그런가. 위도 작구나. 강아지는 금세 잠이 든 듯 색색 거리는 소리를 내어댔다. 긴장이 풀린 가을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가을은 어제 시키고 남긴 찜닭을 데워 먹고는 박스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가을은 볼이 축축해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강아지가 바닥에서 잠든 가을의 볼을 핥고 있었다. 가을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고 강아지는 더욱 놀라 깨갱거리며 상자 속으로 숨었다. 숨어서 벌벌 떠는 강아지를 보는 가을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 된 듯했다. 미안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가도, 쩝-하며 손을 거둔다. 네게 온기를 나누어주지 않을거야. 오늘 너를 유기견 보호소에 맡길 거니까. 오늘이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더 정을 주기 전에 작별할 수 있으니. 시간을 지체해서 좋을 것 없으니 서둘러 집을 나섰다.

    유기견 보호소는 집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였다. 강아지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탈 수도 없었기에 택시를 타고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덕분에 오늘의 일당을 다 채울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라 하셨다. 강아지를 맡기고 오는 것은 금방일 테니까 돌아오는 길도 태워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가을의 말에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시며 반나절이라도 기다려줄 수 있다고 하셨다. 시내를 벗어난 차는 산골 자기로 한참을 들어가더니 한 가건물 앞에 멈춰 섰다. 저멀리 멍멍거리는 소리는 가을이 유기견 보호소에 잘 도착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내심 남의 차를 타면서 강아지가 토를 하거나 오줌을 쌀까 두려웠지만 두 시간 동안 멀미도 안 하고 얌전히 버텨준 강아지가 고마웠다. 가을은 강아지가 든 박스를 들고 건물에 다가섰다. 점차 가을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어느 순간 가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건물에 다가설수록 그녀의 표정은 경악에 가까워졌다. 강아지가 수십, 아니 수백 마리는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강아지들을 모아둔건가? 빽빽한 우리 속에 있는 강아지들은 마치 지하철 속에서 숨이 터질 듯 끼여있는 사람들 같기도 했다. 너희는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든 이런 곳에서 하루 종일 살아가고 있는 거니. 강아지들은 가을의 발소리를 듣고는 더욱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보호소의 대표가 가을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아... 저..."

    가을은 이 많은 강아지들을 보며 강아지를 맡기러 왔다고 말하기 버거웠다. 하지만 대표는 곧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대표가 말했다.

    "강아지를 맡기러 오신 거군요. 이런 곳에 처음 오신 것이죠? 보통 처음 오신 분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시기도 하고, 왜 이렇게 관리하냐며 화를 내시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참 힘듭니다. 하루에도 수십 마리의 강아지가 이곳으로 와요. 아픈 아이도 오고, 갓 태어난 아기도 오고, 다 늙어버린 노견이 오기도 하고요. 한 달 정도 이곳에서 지내면서 새 주인을 찾아주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은 안락사를 당해요. 수십 마리가 들어오니까, 그만큼 수십 마리를 안락사를 시켜줘야만 이곳을 관리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좀 괴롭습니다. 하하. 강아지를 살리려고 시작한 일인데 매일 수십 마리를 죽이고 있으니 저같이 못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하."

    씁쓸한 표정을 띤 대표의 어깨 너머로 수백 마리의 강아지들이 가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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