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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류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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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커 Aug 01. 2023

5. 와인인 듯 커피인 듯(4)

    다음 날 아침, 가을은 몸도 마음도 찌뿌둥하여 오만상을 지으며 눈을 떴다. 몸이 찌뿌둥한 것은 오랜만에 밤 늦게까지 반죽을 치대서 그렇다 쳐도. 마음은 왜? 그건 바로 밤 사이 커진 께름칙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이성이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었다. 가을에게 여러 목소리가 귓속말처럼 들려왔다.

    '하루 이틀만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이제와서 무슨 낯짝으로 염치도 없이 찾아가는 거야?'

    '사장은 너를 원망하고 있을 거야. 괜히 얼굴 붉히지 말고 커피 오마카세의 추억은 잊고 살아.'

    '그 빵을 싫어하면 어쩌려고? 차라리 과일 세트가 낫겠다.'

    가을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은 말도 없이 몇 달을 잠적해 있었다. 아무리 포용심이 넓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손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장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사장을 찾아가는 건 그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가을은 사장이 보고 싶었다. 커피 오마카세가 그리웠다. 그러니까.

    '이기적으로 구는 거야.'

    이기적으로 사라졌던 나였다. 그만큼만 더 이기적이면 되는 것이다. 괜히 사장에게 빵을 선물하고 싶어서 찾아간 척하지 말자. 일개 카페 사장과 손님이라고 생각하자. 내 돈 내고 커피를 사 마시는 건 당연한 손님의 권리이다. 그러니 나는 커피 오마카세에 가서 돈을 지불하는 대가로 커피를 요구해도 된다. 사장을 만나 커피를 선사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당당하게! 빵이라도 구워 가니 내쫓지는 않지 않겠는가. 가을은 스스로를 못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버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사장이 마들렌을 던지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그녀를 직접 마주하기로 결심하며 빵을 가방에 담았다.


    역시나 사람들로 가득 찬 퇴근길의 지하철. 사장을 보러 갈 생각을 하니 이어폰을 꽃은 가을의 귀 사이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겼다. 사장이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필요에 의해 찾아가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그녀는 커피 오마카세 앞에 섰다.

    "아..."

    사장이 투명하고 큰 창 앞에 서있는 가을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과 눈을 마주친 가을은 자신이 찾아와 놓고 되려 사장보다 더욱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일개 사장과 손님은 무슨, 가을은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 거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 둘은 몇 초간 목석처럼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건 사장이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빠져나와 가을을 마중 나왔다. 사장이 문을 열자 카페 특유의 공기가 코에 닿았다. 사장이 말했다.

    "얼른 들어와요."

    오랜만에 찾아온 이곳이지만, 가을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에 상관없이 여전히 향수로운 곳이었다.

    슬며시 열린 문 틈 새로 발을 내미는 가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이제껏 했던 걱정이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혹시 이 감정이 과장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장의 눈빛은 자식을 반기는 부모님의 눈과 겹쳐 보였다. 집에 돌아온 자식을 원망하는 부모는 없듯, 사장에게서도 가을을 원망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장은 가을과 건강히 다시 만난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안도감에 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가을은 카운터 앞에 섰고 사장은 가을을 위해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 커피를 만드는 사장에게 가을이 말했다.

    "사장님. 보고 싶었어요."

    사장은 머그컵 두 잔을 양손에 쥐고는 가을의 앞에 섰다. 양 쪽의 컵 위로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장이 커피를 선사해 주며 말했다.

    "오늘 가을씨는 누가 뭐래도 아메리카노의 날이에요."

    가을은 괜히 더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 제가 어떤 빵을 만들어왔게요?"

    가을이 빵이 담긴 봉지를 흔들거리자 사장은 서랍을 열어 화려한 꽃무늬 모양의 접시와 포크를 챙기고는 가을이 매번 앉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장은 가을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이 시간이 어찌나 그리웠던지요."

    가을은 서둘러 자리에 앉아 봉지 안의 토-바-크-마(토마토-바질-크림치즈-마들렌)를 접시 위에 올렸다. 빵을 꺼내는 가을의 손이 미세히 흔들렸다. 얼마 만에 선보이는 빵이던가. 가을의 떨리는 마음과 빵냄새는 서로 뒤엉켜 카페 안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 마들렌은 피자가 떠오르는 맛이라 살짝 데우면 훨씬 맛있을 텐데.'

    '하루 사이에 바질 향이 더 약해져 버렸네.'

    '달콤한 맛을 더해줄 소스를 챙겨 올 걸 그랬나?'

    머릿속이 분주해진 가을은 '얼음-'이 되어 빵을 꺼내다 만 어색한 자세로 멈춰있었다. 사장은 마들렌의 배꼽을 포크로 콕 찌르고는 가을에게 먼저 건네고, 다른 하나를 손으로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사장의 감탄사는 가을에게 '땡-'이 되어주었다. 정신이 든 가을도 서둘러 마들렌을 입에 넣었다.

    "음-"

    가을의 감탄사였다. 하루가 지나긴 했지만 아직 풍미가 살아있었다. 오븐에 3분 정도 데우면 겉이 다시 바삭해졌겠지만, 부드러운 마들렌도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가을은 빵을 삼키기 전에 사장이 선사한 커피를 한 모금 담았다. 빵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상큼, 새콤, 개운함으로 가득했던 아메리카노가 마들렌과 어우러지더니 그 안에서 딸기 맛을 내뿜기 시작했다. 톡 쏘는 산미 때문일까. 끝에 남은 씁쓸함 때문일까. 그 맛이 마치 와인 같기도 했다. 마들렌 피자에 아메리카노 와인이라, 역시 사장의 안목은 매번 가을을 황홀하게 했다. 마들렌 한 입, 아메리카노 한 입, 다시 또 마들렌 한 입. 가을과 사장은 한동안 고요히 빵과 커피를 음미했다. 그러던 가을은 문득 궁금해졌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피를 선사하는 사장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빵을 선물할 때와 같이 떨리는 마음일까. 손님이 좋아할지 안 할지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을까. 늘 완벽한 커피를 선사하기에 후회는 없겠지. 뿌듯함으로 가득 찬 하루에 지루함 따위가 박혀있긴 할까. 오히려 반대로 더 이상의 뿌듯함 없이 나처럼 쳇바퀴 도는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가을이 물었다.

    "사장님은 커피를 선사해 주실 때 어떤 마음이 들어요?"

    "글쎄요. 반가움?"

    '반가움?'

    가을은 사장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단어가 의아스러웠지만 사장은 별 뜻 아닌 듯 이어서 말했다.

    "상봉씨도 가을씨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아, 상봉아저씨. 가을은 상봉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을이 한창 카페에 출근도장을 찍던 시절, 매일 마주치다 금세 친해진 동네 아저씨였다.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가을이 푸념을 늘어놓던 날, 이미 직장 생활 초고수에 이르렀던 상봉은 가을에게 날것의 조언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눈으로는 웃으며 마스크 뒤로 욕 하는 법이라든가, 화내는 상사의 눈을 맞추는 척 미간에 난 털을 뽑는 상상하는 법이라든가, 가정사를 들먹이며 회식에 빠지는 기술이라든가. 상봉이 없었다면 곧장 사직서를 써내었을 가을이었다.

    "상봉아저씨는 잘 지내시나요?"

    "그럼요. 아드님이 가평으로 내려가서 살기 시작했어요. 이제 그 집은 아빠도, 아들도, 어엿한 독립에 성공한 거죠. 아드님이 주말농장을 시작해서 야채 같은 걸 한 사바리 싸와서 주고 가셔요. 저번에는 나 먹으라고 고구마청을 선물해 준 거 있죠? 그때 상봉씨가 가을씨 오면 고구마라테 꼭 한 번 만들어주라고 해서 딱 가을씨 먹을 만큼만 남겨뒀어요. 오늘은 안 줄 거니까 다음에 또 와요. 그러면 아주 달콤하게 내어줄게요."

    사장은 말도 없이 사라진 내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면서 고구마청을 남겨두었다. 하물며 내가 왜 사라졌는지 궁금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 이유도 묻지 않고 있었다. 궁금증을 내버려 두고 다음을 기약하는 사장의 마음이 고마웠다. 빵을 만들어 고마움에 보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어떤 빵을 만들어볼까. 아차, 집을 떠올린 가을은 잠시 잊고 있던 커피가 떠올랐다.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네. 다음에 또 올게요. 우선 오늘은 빨리 가봐야겠어요. 제가 지금 강아지를 임시보호 하고 있거든요."

    "임시보호를 하고 있다고요? 대단한데요."

    "아니에요. 잠시만 맡아주는 것뿐이에요. 저는 강아지를 키울 여건이 되지 않거든요. 회사를 다니다 보니 강아지와 함께해 줄 시간이 거의 없어서... 또 한 생명을 10년 넘게 지켜낼 자신도 없고요. 원래 유기견 보호소에 맡기려다가 데려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를 평생 7평짜리 원룸에서 불행하게 살게 할 수는 없어요. 사장님,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가을의 말을 경청하던 사장은 먹던 마들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싸고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 사장이 말했다.

    "음, 그것 참 어렵네요. 가을씨도 정이 많이 들었을텐데 아쉽겠어요."

    "네, 실은 정이 좀 들긴 했어요. 지금도 커피가 저녁을 먹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에요. 하루종일 안 먹었을 게 뻔하거든요. 얘가 산책을 안 하면 밥을 잘 안 먹어서... 빨리 집에 가서 잠깐이라도 산책을 시켜줘야 입맛이 돌텐데, 마음 한편이 무거워요.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같이 자는 것도 불편했는데 지금은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 당연해져서 조금 무서워지는 거 있죠.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커지니까 더욱 빨리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요."

    "주인을 찾아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고생이 많겠어요."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몰랐어요. 매일 밤마다 SNS에 글을 올리고는 있는데 주인은 안 나타나고 악플만 달리더라고요. 진정 강아지를 생각한다면 직접 키워야지 왜 파양 하냐고, 제가 강아지를 한 번 더 죽이는 거라고요. 뭐, 맞는 말이에요. 저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다고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강아지를 넘기려는 거죠."

    가을은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난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오히려 사장만이 그 비난에 동의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제일 생각하는 건 가을씨겠죠. 누구도 그런 가을씨보고 강아지를 키우라 마라 간섭할 수 없어요. 혹시 제가 새 주인을 알아봐도 될까요? 여기 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거든요. 어떤 조건이면 좋겠어요?"

    가을의 눈이 번떡였다. 그렇다. 사장은 카페 주인이다. 낮에 오는 손님들 중에 커피를 키울 적임자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프리랜서라든가, 재택근무자라든가 말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커피의 진정한 주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가을은 들뜨면서도 차분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대답했다.

    "정말 감사해요 사장님. 이렇게 또 신세를 지네요. 조건은... 글쎄요, 우선 저처럼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커피 옆에 많이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음, 밥 잘 챙겨주는 사람... 간식 너무 많이 안주는 사람, 그렇다고 너무 안 주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커피는 간식을 한 입 먹여줘야 입맛이 돌아서 밥을 잘 먹거든요."

    가을은 점점 커피와의 소중한 추억에 빠져들고 있었다.

    "매일 산책시켜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산책할 때 커피가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가게 해주는 사람... 아참, 커피는 실컷 뛰다가 갑자기 주저앉을 때가 있거든요. 애가 지치면 그 자리에 대자로 누워버려요. 그때 꼭 안아서 집에 데려와줄 사람... 그리고 밤에 같이 자주는 사람, 커피가 제 옆구리에서 자는 걸 좋아하거든요. 턱 자주 긁어주고, 무거운 옷은 입히면 안돼요... 커피가 옷을 불편해해서..."

    커피에 대한 미안함인지, 이별에 대한 아쉬움인지, 혼자 남게 될 쓸쓸함인지, 가을의 복잡한 마음을 분출하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가을씨,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가을씨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가을씨같은 사람을 찾아볼게요. 다만 직장을 다니지 않는 사람으로요. 그거면 충분할 거예요."

    사장은 포크를 쥔 가을의 손을 포근히 잡아주었다. 방금까지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쥐고 있었기 때문일까. 사장의 손은 따뜻하다기보다는 뜨끈했다. 가을은 이제 사장이 신기함을 넘어 신비로워 보였다. 환상적인 커피를 선사해 주는 것도, 자신도 모르는 속 마음을 간파하는 것도, 모든 물음에 실마리를 내어 주는 것도.

    가을은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사장의 정체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은 어쩌다가 커피 오마카세를 열게 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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