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음악의 후각화

“그 시절의 향기를 기억하는 법”

by 손익분기점

이어폰 또는 스피커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때때로 계절의 분위기를 바꾸고, 공간의 냄새를 뒤바꿔 놓습니다. 노래를 듣다 보면, 그 시절 계절과 함께한 추억과 향기들이 강렬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이번 14화에서는 나의 기억 깊숙한 곳, 음악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 나타나는 '기억의 향기'들을 하나씩 맡아보려 합니다.



2009년, 발라드로 물든 그 시절 겨울


나의 2009년 겨울은 차갑지만 포근한 '찬 공기의 냄새'로 기억된다. 스마트폰 대신 투박한 2G 폰의 문자 알림이 소통의 전부였던 시절.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동네를 뛰어다니던 그해 겨울의 공기 속에는 그 시절 발라드들이 있었다.


학교를 마친 금요일 저녁이면 집이 비는 친구 집에 모여 앉아 <뮤직뱅크>를 보며 이승기의 ‘되돌리다’를 흥얼거리고, 노래방에 가면 누가 더 잘 부르나 내기라도 하듯 박효신의 ‘사랑한 후에’를 목놓아 불렀었다. 좁은 방 안, 쾌쾌한 마이크 덮개 냄새와 뜨겁게 달궈진 열기 속에서 차가운 겨울의 추위를 추억과 함께 이겨내고 있었다. 이제와 그 노래들을 다시 들으면, 친구들과 함께 나누던 이야기들과 그 겨울의 포근한 찬 공기가 떠오르곤 한다.


박효신 - 사랑한 후에





2015년, 비타민이 되어 주었던 걸그룹 곡



2015년, 시간을 건너뛰어 군 시절로 향하면 음악은 전혀 다른 냄새로 기억된다. 짙은 무채색으로 가득한 생활관, 고된 훈련 끝에 맡았던 땀 냄새와 흙먼지의 향기. 그 삭막한 공기를 단숨에 환기해 주던 것은 TV 속 트와이스와 레드벨벳의 노래였다. 그 시절 트와이스와 레드벨뱃은 갓 데뷔한 신인 걸그룹이었다.


활동복에 배어 있던 다우닝 세제 냄새, 관물대 구석에 뿌려두었던 저렴한 스킨 냄새, 그리고 생활관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숨죽이며 보던 걸그룹 무대. 당시의 걸그룹 음악들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차가운 군부대 너머 '바깥세상'의 싱그러운 향기를 실어다 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그 시절의 전주만 흘러나와도, 나는 잠시 관물대 앞을 서성이며, 동기들과 함께 걸그룹의 무대를 보며 설레던 그 시절의 서툰 청년으로 돌아가곤 한다.


트와이스 - OOH-AHH하게




2018년, 무더웠던 여름과 시원한 트로피칼



가장 가까운 기억 속에서 음악은 '시원하고 신나는 트로피칼 향기'를 내뿜습니다. 유독 뜨거웠던 2018년의 여름, 도시의 아스팔트는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이글거렸지만, 나의 플레이리스트 속에서는 숀(SHAUN)의 ‘Way Back Home’ 같은 트로피칼 감성의 곡들이 있었다.


통통 튀는 비트와 청량한 사운드는 숨 막히는 열대야마저 특별한 휴양지의 밤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던 그 시절 여름, 이어폰을 꽂는 순간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사라지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해 여름의 노래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서 마셨던 시원한 탄산음료의 탄산처럼, 톡 쏘는 청량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2019년부터 코로나가 터지면서 이 시절 트로피칼 장르의 곡들은 더욱 뚜렷하게 기억된다.


숀(SHAUN) - Way Back Home


이처럼 이어폰 또는 스피커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때때로 공기의 분위기를 바꾸고, 공간의 냄새를 뒤바꿔 놓는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듣다 보면, 그 시절 계절과 함께한 향기들이 강렬하게 피어오르곤 한다.


음악은 우리 기억의 보관함 속에 ‘향기’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다.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 사소하고도 선명한 흔적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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