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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동 May 06. 2020

[단편] 주인님을 찾습니다 - 1

아파트 동 대표 체험기

 초겨울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요 며칠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아파트 근처 인도에는 한동안 잘도 버티던 은행나무마저 우수수 잎사귀를 떨어내고 앙상한 가지만으로 겨우살이 준비에 들어갔다.

 퇴근길 바닥에는 오후에 내린 때 이른 진눈깨비 잔설과 은행잎이 뒤엉켜 내일 새벽 가뜩이나 분주할 환경미화원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P과장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로에 짓눌린 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오늘따라 맨 꼭대기 층에서 한참을 정지한 엘리베이터는 마치 이제는 사라진 비둘기호 기차처럼 층마다 내리고 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또 택배 아저씨로군. 최소한 출퇴근 시간에는 피해야 하는 거 아냐? 경비원 아저씨는 이런 거 관리 안 하고 뭐 하는지 몰라!”

 뒤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연실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연로하신 택배 아저씨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를 반복하면서 텅 빈 밀차를 앞세우고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주민들 사이를 황급히 빠져나간다. P과장도 다른 주민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서로 간 가볍고도 의례적인 눈인사를 한다. 어색한 눈길이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헤매던 중, 벽에 붙어 있는 공고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동 대표 선출의 건’     

 내용을 대충 훑어보니, 아파트 관리실에서 공지한 동 대표 선출 공고문이다. 3동은 동 대표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더 이상 지원자가 없을 경우, 옆 2동 대표가 3동 대표까지 겸임한다는 안내문이다.
    

 저녁식사 후, P과장은 소파에 앉아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며 화면을 보다 갑자기 아내에게,   

 “아까 올라오다 보니 우리 동 대표 선출한다더라.”
무심코 한 마디 던진다.

 “왜, 관심 있어? 당신, 그런데 나서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타입이잖아.”

  “그렇기는 한데, 이번에도 지원자가 없으면 옆 2동과 합친다잖아. 무슨 한일합방도 아니고... 그래도 우리가 이 자리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는데, 갑자기 자존심이 확 상하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한다.

 “그럼, 당신이 한번 해 보던지. 그런데 회사 일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은 양반이 동 대표일 까지... 그리고 당신 나이면 거기서는 완전 영계야. 비스무레한 또래도 없을 걸! 무엇보다도 당신 같은 원칙주의자한테 그 일이 잘 맞을지도 걱정스럽네. 가보면 알겠지만 이상한 거 많이 볼 텐데...”

 아내는 심드렁히 대꾸한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현재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맞은편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였다. 돌아가면서 순서대로 하는 거라는 통장 아주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신혼을 갓 뗀 아내는 얼결에 동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첫 회의부터 그만 학을 떼이고 말았다.  
   

 “아니, 화단 공사를 하면서 업체에 계약금으로 공사대금을 다 주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 업체가 마무리를 대충 해서 몇 달이 지나도록 아직도 정리가 안 되고 엉망이잖아요.”
통장은 화를 내면서 항의한다. 

 “아니, 관행이 그런 걸 내가 뭐 잘못했나요? 저도 힘들어서 못해 먹겠어요.”

 아파트 부녀회 회장은 핏대를 올리며 씩씩 거린다. 그리고는,

 “그래서 내가 업체로부터 뭘 받아먹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아니, 누가 받아먹었데요? 뭐, 제 발 저리시는 거 있으세요?”

 이런 식의 끝도 없는 험악한 회의 분위기에 질려버린 아내는 임기가 종료되자마자 한 번 더 일하자는 통장 아주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쳤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다.

  P과장은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문득, 몇 년 전 아파트 관리비 부정사건으로 관리소장이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떠오르기도 했고, 어느 아파트에서는 난방비 이슈로 유명한 여자 탤런트와 동 대표 간에 분쟁이 붙어 소송까지 갔다는 뉴스도 본 적이 있다. 도대체, 아파트 운영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무슨 판도라 상자라도 있는 걸까? 진짜!’   
   

 ‘그럼, 그 판도라 상자 한번 열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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