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동 대표 체험기
다음날 토요일 아침,
P과장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다.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굳이 찾아갈 일이 없어 직접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는 여직원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3동 주민인데 동 대표 출마 건으로 왔다고 쭈뼛쭈뼛 설명한다.
그러자, 갑자기 저 뒤에 앉아 있던 관리소장이 나타나 큰 소리로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반갑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그러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미스 김, 여기 따듯한 커피 두 잔.”
원래 P는 믹스커피를 안 먹는데 하는 수 없이 예의상 조금씩 입에 댄 채 관리소장과 첫 대면을 한다. 소장은 60대의 평범하고도 어수룩한 인상이다.
그는 얼핏 보면 상대방이 편안하고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 같기도 하고, 한 번 더 들여다보면 그 속에 능구렁이가 도대체 몇 마리나 뒤엉켜 살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노회老獪한 인상을 동시에 주는 분이다.
그는 아파트 관리상의 어려움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본인이 소장 생활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렇게 힘든 아파트는 처음이라는 둥,
관리 사무실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동 대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거라는 둥,
월 1회 회의만 참석해 주면 되고 참석수당 5만 원은 다음날 계좌에 꼬박꼬박 입금되기 때문에 솔찮게 담배 값에 유용할 거라는 등의 두서없는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는, 젊으신 분이 이렇게 적극 참여해 주셔서 우리 아파트 미래가 밝아질 것이라는 말 또한 잊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어차피 경쟁자도 없는 단독 입후보이기 때문에 신청서에 간단히 기재하고 서명과 동시에 P과장은 처음으로 동 대표가 되었다. 옆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관리소장은 축하드린다며 한껏 아부를 한 후에 문밖에 까지 나와 잘 부탁드린다고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배웅했다.
그는 자기도 부족한 점이 많고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러 오히려 잘 부탁드린다는 답례를 한 후에,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평소에는 무심히 쳐다보며 형식적인 목례나 하던 경비원 아저씨가 그새 어디서 연락을 받았는지 황급히 뛰어나와 역시 90도 인사를 하면서 중책을 맡으셨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P과장은 갑자기 ‘급 친절 모드’로 바뀐 경비원 아저씨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아직도 붙어 있는 동 대표 선출 안내문이 어제 본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이 스치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야, 동 대표도 벼슬인가! 이것도 권력인가!’
월요일 아침, 지은 지 35년이 넘은 아파트 주차환경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P과장은 여덟 시부터 회의가 있어 주차장에서 차를 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비원 아저씨 2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순식간에 앞뒤 차를 밀어내고는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하고 떠나는 그의 차를 향해 인사를 했다.
저녁 퇴근 무렵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었다. 심지어, 어느 주말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중년 남자분이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 다가와 본인을 아파트 경비반장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최근 아파트 경비 현황, CCTV 교체 작업, 그 밖에 다양한 민원과 해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끝으로, P에게는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개별 경비원에게 알리지 말고 본인에게 직접 연락해 주시면 즉시 처리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90도 인사 후 촘촘히 자리를 떠났다.
한편, P과장은 회사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아파트 동 대표에 대해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동 대표를 하게 된 계기, 역할, 그리고 달라진 경비원 서비스 등을 적당히 버무려서 나름 재미있게 한참을 떠드는데 반응이 영 아니다.
“어라, 왜? 내 이야기 재미없어?”
“......”
“어, 나는 나름 기대되는데.. 내가 사는 공동체에 참여해서 더 좋은 주거환경을 만들어 간다.
느낌 좋을 것 같은데.... 꼭 촛불 들고 광화문이라도 가야 참여 민주주의 하는 건가?
일상을 바꾸는 것... 뭐라고 할까? 좀 거창하게 덧붙이면, 생활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 그런 거 아냐?”
그가 열변을 토하는 중에 입사 동기 김 과장이 한마디 거든다.
“취지는 알겠는데, 아파트 동 대표는 은퇴하고 할 일 없으신 분들이 취미 삼아하는 거 아냐? 우리 세대가 끼기에는 뭔가 좀 축축한 느낌이 드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지, 뭘.”
“제가 보기에는 먹을 떡도 없을 것 같은데요...”
킥킥 거리며 송 대리가 덧붙인다.
“P과장, 괜히 늙어 보여. 요새 젊은 직원들한테 그런 얘기하면 칙칙하다고 싫어해. 분위기 좀 바꿔서 다른 재미있는 얘기 좀 하지 그래.”
부서 직원들 눈치를 쭈욱 훑은 오 팀장이 정리한다.
드디어 첫 동 대표 회의가 월말에 개최되었다.
P는 사전에 배포된 회의 안건을 회사 서류처럼 꼼꼼히 읽어보고 질의사항은 빨간색으로 별도 체크를 한 후 회의가 개최되는 관리사무소 회의실로 들어간다.
도착해보니, 아파트 관리소장이 먼저 와 기다리며 정중히 인사한다. P가 제일 먼저 도착한 듯하다. 잠시 후, 한 명씩 순차적으로 들어오는데 이상하게도 눈에 익은 분들이 많다.
단지 내 인테리어 업체 사장, 하늘 부동산중개소 사장, 우리 부동산중개소 사장, 초면인 듯한 70세가량 되어 보이는 두 분, 얼마 전에 교감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7동 대표 겸 동 대표 회장. 얼핏 보아도, 평균 연령 65세 이상으로 30대 후반인 P보다 거의 두 배의 인생을 사신 분들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면 모를까, 적응이 쉽지 않아 보인다.
‘나이는 그렇다 치고, 상가 사장님들은 이해관계가 있어서 아무리 주민이더라도 동 대표하기에는 부적절하지 않나? 오해가 많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P의 머릿속에 마치 들어갔다 나왔다는 듯이,
“나는 지난번에도 동 대표를 해서 이번에는 안 나오려고 했는데... 뭐, 할 사람이 있어야지! 하도 사람이 없다고 관리소장이 몇 번이나 부탁을 해서 억지로 나왔네, 억지로.”
1동 대표이신 하늘 부동산 사장은 ‘억지로’라는 단어를 굳이 반복 사용하면서 본인은 그야말로 억지로 나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4동 대표이자 우리 부동산 사장 역시 관리소장 때문에 거의 끌려 나왔다면서 갑자기 옆에 앉아 있는 P과장을 힐끗 보더니 3동 대표 같은 젊은 사람이 앞으로 우리 아파트를 이끌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분들 말씀 대부분은 사실일 것이다. 아파트를 구성하는 7개 동 중에서 복수 후보자가 출마하여 경선을 한 경우는 없었으며, 대부분 단수 후보로 추대되는 분위기였다. 이렇듯, 아파트 주인인 입주민의 무관심 속에 대표성을 부여받은 동 대표들이 어떻게 아파트를 이끌어 가는지 지금부터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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